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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

  • 성경말씀 : 누가복음 23:33-38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3-20

 

2022년 3월 20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23:34-39

제목 :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

 

예수님은 마가복음 15:25, 33, 34에 보면 유월절 즉 아빕월 14일 제3시 즉 오전 9시쯤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6시간 후인 제9시 즉 오후 3시에 숨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기록되어 있고 가상칠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7:48에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칼라모)에 꿰어 마시게 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마가복음15:36에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였다는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23:36에 군인들이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었다는 말씀이 있고,

요한복음19:29에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휘소포)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였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수들에 베푸는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 혹은 우슬초에 꿰어 드렸다 하였는데 갈대도 우슬초도 그 길이가 50cm를 넘지 못하는 길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높이가 그 정도 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요한복은19:26에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밑에가 아니라 곁에(파리스테미) 서 있는 것을 보시고 하였는데 십자가 곁에 있었던 사도 요한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히 들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상칠언 말씀을 영화에서 보듯이 우리의 시선 저 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하며 남기신 말씀임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순서대로 추정하여 보면

첫 번째 말씀은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인데 이는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들에 해당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누어서 제비 뽑아 가지려 했던 로마 군병들, 구경하는 백성들, 비웃는 관리들, 희롱하는 군인들, 혹은 군중 어딘가에 숨어서 보고 있었을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용서에는 세 가지 정황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용서의 외적형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하는 관계로 되어 있어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자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스데반도 그러하고 손양원목사님도 그 권능을 받으셨기에 그리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용서해야 할 자들이 있는 것과 같이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내가 용서해야할 대상과 내가 용서 받아야 할 대상은 비슷할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은 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와 같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를 용서 받은 자로서 타인을 용서해야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네가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하시며 회개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처형을 받고 있던 한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주변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내 문제가 몹시 어려울 때에도 타자의 고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격입니다.

그 행악자는 다른 행악자와 같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회개한 자 만이 갈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행악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오래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하니 우리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간과하지 말고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여자와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며, 직접적으로는 효도입니다.

양육강식은 본능이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는 인격이고 신앙입니다.

자식사랑은 본능이지만 부모에 대한 공경은 인격이고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자녀를 사랑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종교입니다. 십계명의 중심에 부모 공경이 있고, 가상칠언의 말씀에도 그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아내에게 남긴 유서>

1910년 3월 24일(사형 이틀 전, 30살) 장부 안 도마(토마스) 배

우리는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배려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헤어지게 되었소. 그러나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께 효도를 다하시오. 두 동생과 화목하며, 자식의 교육에 힘쓰길 바라오.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세에 영원한 복락을 희망할 뿐이오.

장남(안중생)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심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하느님께 바치어 장래에 (가톨릭)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국에서 기쁘게 만나서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네 번째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을 끝내 구원으로 인도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외치심이 불신앙이나 원망처럼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들리지 않고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 어찌 그리 무능하십니까? 이것이 나의 전능임을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너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네가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은총이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의심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에서 누가가 곧 네로의 공연장에서 짐승과 군사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이들에게 한 말입니다.

“아주 잠깐일 것입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품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 잠깐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외침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도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요19:28)입니다.

십자가는 목마른 곳입니다. 새벽부터 긴 시간 재판이 있었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심한 채찍질이 있었습니다. 그 육신적 목마름과 함께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하신 그 목마름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을 위한 목마름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셔서 그 의를 이루시고자 하는 목마름에 들어가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불의함에 처해진 경험을 하고 나서야 의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의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현재의 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혹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 불의함을 당하고 나서야 의를 찾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의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목마름이 있는 자가 생명수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심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도 이루어 놓으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실패처럼 보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고 부끄러움 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훈련시키신 결과가 다 수포로 돌아간 듯 보였습니다. 갈릴리 어느 작은 지역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듯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이스라엘 내의 적은 무리들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다 이루었다 하심은 주님께서 하실 일을 다 마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나머지는 너희들의 몫이다 부탁하심입니다.

요한이 가상칠언 중에 세 말씀(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지만 요한만은 십자가까지 따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야 들리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눅23:46) 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여정을 거친다 하여도 마지막에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요즘 장례가 많이 나서 이 말씀이 더욱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죽는 다고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종명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복이라면 하나님 품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어서 그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이 십계명으로 요약이 된다면 신약의 말씀은 가상칠언으로 그리되는 듯합니다.

가상칠언의 말씀이 들려지는 그리고 그 말씀에 합당한 대답이 있는 앞으로 남은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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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자가에서 남기신 말씀
  • 2022-03-22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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