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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십자가를 지시다

  • 성경말씀 : 마태복음 27:32-38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4-10

 

2022년 4월 10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태복음27:32-38

제목 : 십자가를 지시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하고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일 못 되어 빌라도의 법정에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즉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셔야 했는데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합니다.

골고다는 헤롯 궁전이 있었던 구 예루살렘의 북쪽 성벽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문 밖이라 하였습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거리로는 약 800m정도이고 14곳에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 지점에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의 눈이 마주쳤다는 기록이 있고,

다섯 번째 지점에서 본문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길을 가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된 곳이라는 기록이 있고,

여섯 번째 지점에서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손수건을 내어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덟 번째 지점에서 눅23:28의 말씀,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이 길에서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눅23:27) 하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한 울음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한 인간의 고난에 대한 울음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 채찍의 끝에는 납덩이와 뼈조각 같은 것이 있어 살점을 파고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하니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셨을 그 모습은 슬픔과 고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아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 대한 어머니의 울음이었습니다.

둘째는 부당한 고난에 대한 울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로마 총독 빌라도도 로마법으로 보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으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불충하는 것이라고 공격해 오는 유대인들의 간악함을 이겨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세숫대야의 물에 손을 씻으며 이 일에 자신의 무죄함을 나타내려 하였지만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적인 고통에 더하여 불의한 자들에 의한 부당한 고난이었습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울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은혜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당하고 계시는 고난이 자신들을 대신하시는 고난이었음을 깨닫고 있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주전 8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주로 로마제국이 중형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입니다.

십자가형이 고통스러운 것은 빨리 죽지 않는 다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대개 죄수들은 몇일씩 혹은 일주일을 죽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매달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게 하던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가장 은혜롭고 거룩한 표시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상징적인 표시가 십자가입니다.

천주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아니 계신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천주교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고난을, 개신교에서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서방교회는 붉은 색 십자가인데 이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나타내고 있고, 동방 교회는 흰색 십자가인데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강조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십자가 탑이 있던 곳을 보면 ‘아 저기에 교회가 있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십자가가 참 많은 나라입니다.

만약 예수님 당시의 로마사람들이 와서 본다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니 이 땅에는 이렇게 십자가형을 행하는 곳이 많습니까? 하고 물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끼고 있는 반지에 표시된 십자가 표시 혹은 목걸이의 십자가 표시를 본다면 이 사람들이 앞으로 십자가형에 처형될 사람들이라는 표시입니까?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의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강도들이 진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는 자기 죄 값을 치르는 의미입니다.

강도들이 어떤 죄를 졌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도 중 한 명은 누가복음 23:41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십자가는 자기들이 지은 죄 값에 해당하는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에도 내가 지은 죄에 해당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부정하고 지지 않으려한다면 우리는 강도만도 못한 자일 것입니다.

구약의 5대 제사에 보면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건제는 자기의 지은 죄 값을 120%의 액수로 환산하여 제물을 바치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죄 값이 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하는 죄 값은 내가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강도들이 진 십자가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데 지고 가야야 할 십자가입니다.   

 

둘째는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입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쪽의 지중해와 인근 해 있는 곳입니다. 현재 리비아 땅입니다.

시몬은 이곳에 사는 유대인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조상이나 그가 구레네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 죄수들은 자신이 질 십자가 형틀을 처형장까지 지고 가야 했는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치고 상하셔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가시다가 자꾸 넘어지자 로마병사가 지나고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 형틀을 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짐작컨대 다른 사람들은 못 본체 한다든지 흥미롭게 혹은 조롱하며 지나쳤는데 구레네 시몬은 측은히 여기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지나치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16:13에 보면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보낸 안부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主) 안에서 택(擇)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問安)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루포와 그 어머니는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과 부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로 보건데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초대 교회 특히 로마 교회의 한 역할을 감당하는 가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연단과 변화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 그래서 우리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연단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이 이 십자가를 스스로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의 연단과 변화를 위하여 주시는 십자가를 잘 분별하시고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과정 속에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그에게 필요한 일이라 여기신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며 또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 한 강도의 증언처럼 십자가를 지실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로마인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꾀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란 죄명을 씌워 처형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조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 십자가의 뜻을 아시고 받아들이심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결단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마치 대속죄일의 염소가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여 번제의 제물로 바쳐지고, 아사셀에게 보내진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그 십자가입니다.

이를 대속의 십자가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지실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온 세상을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온 세상이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를 통해서, 

첫째, 우리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조금 더 깨달을 수 있게 하심입니다.

십자가를 져보지 않은 자는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하심입니다.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억울한 일을 십자가의 믿음으로 감당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한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알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못 박을 수 있게 하심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고민은 죽어야 할 우리의 옛사람이 죽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을 수 있도록, 옛사람의 어느 한 부분을 못박을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놓으신 곳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못 박히신 곳이며 죽임을 당하신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십자가에 못 박히어야 하겠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증거를 요구하는 도마에게 그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십자가의 논리는 세상에서 보면 미련하고 미련한 일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다른 것 알기보다 십자가를 더 알기를 원하고, 다른 것 붙잡기보다 십자가를 더 붙잡기를 원하고, 살아남으려 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에, 내가 계획하는 것에, 내가 판단하는 것에, 내가 의지하는 것에 십자가가 있는 살펴보시고 십자가가 있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없는 어떤 방정식도 좋은 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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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설교자
  • 1
  •  십자가를 지시다
  • 2022-04-12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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