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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섬김이 자라자

  • 성경말씀 : 마가복음10:45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6-01-24

성경 : 마가복음 10:45

제목 : 섬김이 자라자

 

지금은 교회 주변에서 노숙자나 부랑인들이 사라졌습니다.

노숙하기에 그래도 환경이 좋은 서울역이나 비슷한 시설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년 전까지는 이런 저런 사연을 얘기하는 부랑인들이 꽤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그 분들이 사무실로 들어오면 두 가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어디까지 얼마나 시간을 들여 얘기를 들어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론은 도와 달라는 것인데 그것도 어디까지 얼마나 도와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 몇 년 전에는 노숙인들이 교회 본당에서 자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문이 항상 열려 있고 장의자에서 자기에 적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발적 범죄의 염려, 새벽기도 때의 문제 등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실제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은 냄새였습니다. 이 분들이 씻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다녔기 때문에 몸과 옷에서 나는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그 냄새가 본당에 가득하고 나가고 나서도 의자에 그 냄새가 남아 있고 해서 곤혹스러웠었습니다.

그 때 우리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의논을 했습니다.

첫 번째 안은 일정 시간이 되면 문을 잠그자는 것이었습니다. 타당성이 있는 안 이었지만 기도하기를 원하는 분들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 분들이 씻을 수 있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해 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택의 보일러와 화장실을 연결하는 온수 관을 만들어 여름은 물론 겨울에도 씻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고 갈아입을 수 있는 여벌의 헌옷들을 꽤 준비해 놓았습니다.

노숙자들은 돈도 물론 없지만 돈이 있더라도 어디에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갈아입을 수 있는 곳이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는 없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 찌든 때가 묻은 몸과 옷을 깨끗하게 씻고 나오는 모습은 정말 보기에 좋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역한 냄새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이 아주 좋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노숙자로 우리 교회 본당에서 잠을 자던 분인데 그 때는 백합실만 있었던 때입니다. 그곳에서 일 년이 넘게 기숙을 하면서 낮에는 폐지를 줍고 해서 방을 얻어 자립을 해서 나간 분도 있습니다.

섬김이란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기억중의 한 부분입니다.

되돌아보면 그 때 잘했다주님이 기뻐하셨을 것이고, 주님께 점수 좀 딴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섬김이란 헬라어는 디아코니아인데 이 말은 섬기다, 봉사하다, 시중들다, 돌보다, 돕다, 부양하다, 수종들다, 공양하다, 일하다, 맡다 등의 용례로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섬기는 쪽으로 주로 쓰였지 섬김을 받는 쪽으로는 사용례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늘 말씀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되어 있는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리들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섬기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모두들 섬김을 받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일까요?

우리가 겉 사람으로 옛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과 옛사람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을 때에는 섬김을 받고 싶은 욕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나도 모르게 섬김을 받으려는 의자에 가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속사람 거듭난 사람 즉 새사람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에는 섬김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짊이 됩니다.

더 나아가 섬기려 할 때 그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인 것 같이 여겨지고 절대로 손해가 아닌 것 같고 피곤하고 힘이 들기는 하나 그것을 넘어서는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겉사람과 속사람의 주도권 다툼을 갈라디아서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이 싸움은 한 번에 영원히 결판하는 싸움이 아니고 반복적이며 점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은 경우와 시간에 이기는지 혹은 패하는지는 우리가 할 탓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때로는 섬김을 받고 싶고 때로는 섬기고 싶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만 될 수 없기에 믿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때로는 섬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섬기기도 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과 같이 서로 섬기며 살아야 섬김의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우리가 이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먼저 인사하기, 먼저 말을 걸기, 안부를 묻기, 양보 운전, 예배중 성경을 잘 못 찾는 분을 도와 드리기, 공공질서를 잘 지키기, 어려운 사정이나 의미 있는 일을 위한 모금기사가 났을 때 조금이라도 후원하기 등이 섬김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의 각 구역에서 전 세계 어려운 가정의 여섯 아이를 돕는 것도 좋은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필리핀의 조영태 선교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우리 교회 초록가게에서 매년 팔다 남은 여름 옷을 다 모아서 큰 상자에 넣어 배편으로 보냈는데 근 두 달 만에 도착했다는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고 답장을 하였는데 또 답하시기를 월요일에 각 지역에서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올 터인데 그 때 개봉하면 지난번과 같이 큰 기쁨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입던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않고 초록가게에 가져다주신 분들 그리고 그것들을 잘 모아서 필리핀으로 보낸 우리 교회의 섬김이 그와 같은 기쁨의 열매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섬김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작은 일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하기까지의 섬김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섬김은 나에게 남는 것을 주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주는 데까지 이르는 일입니다.

리빙스턴이 마더 테레사가 마틴 루터 킹이 손양원목사님이 그런 섬김의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는 이런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받는 자들이 기쁨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여 주셨을 때 그들에게는 참 기쁨이 부여되었었습니다.

받아서 부담이 되는 그런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섬김을 재생산하는 섬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자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냥 받는 것으로 그친다든지 더 받으려고만 하게 만드는 그런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섬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감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자들은 끝내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섬김은 크고 으뜸이 되는 길이라고 43-44절에 말씀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세상적으로 크고 으뜸이 되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크고 으뜸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것이고 그것을 주님이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수만 있다면 힘을 다하여 섬김의 대상에게 주님께 하듯 할 때에 우리의 섬김도 주님의 섬김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날로 자라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2. 가장 기억에 남는 섬김을 받은 일은?

3. 섬김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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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김이 자라자
  • 2016-01-26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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