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가 되자
사랑하는 신앙의 겨레들이여!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상실(喪失)되어가는 이 시대에 있어 다소라도 하나님 사랑이
회복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성심(聖心)으로, 이 책자를 발간코자 합니다.
특별히 이 책자가 나오기까지 수고해주신 당회원 여러분들과 전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빌며,
또 이 책자를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에게 성삼위의 역사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마땅히 받으셔야 할 그 사랑을 그렇게도 간절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겨레들이여!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이란 깃발 아래로 총진군합시다.
2000년 6월에
최성오 목사 씀
벌써 우리 광동교회(光東敎會)가 이 땅 위에 서게 된지도 어언간(於焉間) 二十六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간(如干)한 어려운 풍랑(風浪)도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지극(至極)한 사랑과 보호(保護)를 입어 개신교(改新敎)의 생명인 복음 신앙을
굳게 지켜왔을 뿐 아니라 선구자(先驅者)로서의 사명의 일부(一部)도 자부(自負)할 수 있게 되었던
사실을 생각하니 그 망극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報答)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 자신을 최대(最大)의 은혜자로 자처하면서 날뛰던 사실을 만인(萬人) 앞에 공개(公開)코자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 내 자신의 속죄(贖罪)를 위함이요.
둘째 ... 오늘도 지난날에 나와 같이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이들을 바른 길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제주도 피난살이에서 우연히 신병(身病)을 얻어 꼭 죽게만 되고 보니 70노모(老母)를 비롯한 10여 식구(食口)
모두 눈물뿐이고 본인(本人)되는 나는 사방으로 기도(祈禱) 처소를 찾아 헤매였으나 한라산 일대에는 아직도 무장공비(武裝共匪)들이 출몰하던 때라,
하는 수 없이 교회 교역자 가정에 붙어 있는 헛간 한쪽을 빌려 대강 손질해 그곳에서 6개월 동안 기도라고 하다가
모든 피난민들이 L.S.T.로 귀가(歸家)케 된 것이다. 정작 돌아오고 보니 한두 가지가 문제 아니라, 피난살이란 굴레를 벗고 보니 10여 식구들의 식량(食糧)이 문제요,
또 나에게는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중얼거렸던 기도의 계속이 큰 문제였다. 하루는 나도 모르게 어린 것의 손을 잡고 목적(目的)도 없이
집을 나서 남(南)쪽을 향해 얼마동안 걷고 보니, 관악산(冠岳山)이란 곳에 도착하게 되어, 이곳저곳 기도(祈禱)할만한 처소를 찾아본 결과 드디어 한 곳을 찾아
정(定)하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감사의 기도를 올렸으나 나에게는 초막(草幕) 하나 만들 만한 힘이 없어 걱정이 되던 중,
뜻밖에도 고마운 두 분이 나타나 자진(自進)해서 자비(自費)로 아담하게 초막 한 채를 지어 주셨던 것이다.1953년 12월 7일! 이날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갈망하던
관악산 제단(祭壇)에 처음 올라온 날이나 나 혼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둘이서 행장(行裝)을 풀던
역사적(歷史的)인 날이기도 하다. 입산(入山)기도 날수는 백일로 정(定)하고 실시(實施)해 왔는데, 어느덧 내가 제일(第一)차로 입산기도 하러 이 산에 오른 지도
벌써 五十일이 되는 날이고 보니 내일(來日)이 내게는 기다려지던 오순절 날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오순절 날을 귀중시(貴重視) 하는데 그 이유는 어디있을까?
1. 이 날에는 놀라운 성령강림이 있었고,
2. 성도의 교통으로서는 최고봉(最高峰)이라 할 저 유명한 유무상통(有無相通)까지 일어났으며
3. 하루에 제자(弟子)가 3천이나 더해지고 주께서 구원하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주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1954년 1월 25일(제1차 입산한 오순절 날) 이 날만은 하나님께서도 이 가련한 제단을 무심(無心)히 방치(放置)해
버릴 수는 없어 무슨 역사(役事)로라도 돌보아 주실 것만 같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이 웬일입니까? 전날 밤 몽중(夢中)에는 옛날 정욕(情慾)의 흉(凶)한 거리에서 헤매던 모습을 두 차례나 똑같이 계속 꾸고 나니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철저하게 이 제단에서 먼저 회개하라는 뜻이 계신가보다 라고 생각해 보았다.
드디어 대망(待望)의 二十五일 새 아침은 밝았다.
보혈의 위력에 대하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제단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저녁 무렵에는 혹한(酷寒)에도 불구하고 물을 끓여
목욕정제한 후 사랑의 주님을 뵈오려고 모든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저녁식사는 먹는 듯 마는 듯 초(初) 저녁부터 정성어린 기도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복잡하던 기도 내용(內容)이 고요히 깊어가는 밤과 함께 전점 줄여져
밤1시쯤 되어서는 “금식이냐 예수의 피냐?”라고 하는 너무나 간단한 내용의 기도로 변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아경지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마침 이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이상(異常)한 세계는 열려졌는데, 일찍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던 그리스도의 “피”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순간 나는 미친 사람같이 되어 “무서운 피”, “두려운 피” 하면서 연방 고함을 치면서 자리에 안정(安定)할 수 없이 날뛰게 되었다.
예수의 피가 이처럼 무섭고 두려운 피였던가? 그 피가 이처럼 위력(偉力)과 능력을 가졌던 것이었던가?
전우주 안에 널려있는 전(全) 에너지(힘)을 다 모아 한데 묶어본다 할지라도 예수의 거룩한 피 한 방울의 힘을 당(當)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확실히 체험하게 되었다.
창세(創世) 이래로 인류(人類)의 죄의 산(産)뭉치가 제아무리 높고 험하다 해도 보혈 앞에는 거론(擧論)할
여지조차도 없는 무력한 것이며 마치 태산(泰山) 아래 묘(墓)와도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짐에 대하여
이렇듯 한 번 보혈의 체험이 지나간 후부터는 나의 제단은 무서운 태풍이 지나간 원야(原野)같이 고요하였고
나는 마치 해산의 고통 끝에 기다리던 옥동자(玉童子)를 낳은 산모(産母)와도 같이 보혈의 진리를 품에 안고 남이 모르는 기쁨으로 힘없이 자리에 눕게 되니
자연(自然) 나의 신앙세계는 180도의 전환(轉換)을 보게 되었고, 기독교(基督敎)는 오직 보혈 뿐임을 절감(切感)케 되었다.
이 귀한 체험은 나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주신 것으로 알아 하루속히 보혈의 더럽고
누추한 입술로 증거한다는 것도 문제인 듯해 내가 먼저 부끄럽지 않은 증거자(證據者)가 되어보려고 한 때 수도(修道)에 전력도 해보았으나
그도 여의(如意)치 못해 보혈의 증거(證據)는 그만 실패로 돌아가고만 것이다.
본래(本來) 나는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義人)이 되어 구원됨을 믿을 수 없어 불신하던 위인이다.
三년 동안이나 입산기도 하면서도 자기의(自己義)만을 세워보려고 노력했을 뿐, 한 번도 신의(神意)에는 복종조차도 해보려 하지도 못한
옛날 저 유대 지도자(指導者) <롬 10:3>들과 같은 더러운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지막 입산(7차)
제50일째 되던 날 1956년 10월 7일(주일) 아침 10시경에야 비로소 영음을 통해 그 귀한 그리스도의 대의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때의 기쁨은 정말 천하를 다 얻은듯해 말로서는 무어라고 다 표현(表現)키 어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인자(仁慈)하신 분이시라더니, 그는 나를 3년이나 산중에는 울리신 후에야 그 귀한 그리스도의 대의를 알려주신 것이다.
나는 모태(母胎)로부터의 신앙이라, 인간이란 누구나 범죄하면... 죄의 삯은 사망(死亡)<롬 6:23>이라는
철칙(鐵則) 밑에 지옥형벌을 면(免)할 수는 없으나, 예수만 믿고 회개(悔改)하면 사죄(赦罪)함을 받아 누구나 구원되는 이유(理由)는
주(主)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죽어주신 까닭이라는 것은 추호(秋毫)도 의심(疑心)없이
어려서부터 확고(確固)하게 믿어왔으나, 죄의 인간이 믿기만 하면 누구나 의(義)롭게 되어 의인(義人)만이 가는 천국에 간다는 말씀을<벧후3:13>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저 성경(聖經)이 그리 말씀했으니 반신반의하면서
오랫동안 고민(苦悶)해 왔음을 먼저 솔직히 고백합니다. 내 속에 갖가지 죄악이 가득차 있음을 내가 아는데, 그저 교회만 나간다고 해서
의인(義人)의 대접(待接)을 받아 구원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까닭 없이 칭의치 못한다고까지 말씀하셨는데<잠17:15> 어떻게 죄인이 믿음 하나만으로 의(義)롭게 된다는 말인가?
▣ 이는 예수님이 인간으로 지상(地上)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代身)해
하나님의 법(法)을 완전히 순종(順從)해드려 이로써 죄의 인간들에게 의(義)의 길을 열어주신 까닭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죄인(罪人)들을 위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17:19>,
이 말씀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세상(世上)에 오셔서 거룩히 사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해 거룩히 살아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칼빈 선생도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다 지불(支佛)하시고 우리 대신 완전(完全)히 순종(順從)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聖經)은 이제는 율법(律法) 외(外)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義)니 차별(差別)이 없느니라<롬3:21-22>.
그러므로 사람이 의(義)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律法)의 행위(行爲)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認定)하노라<롬3:28>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래,
아무도 능히 그 수(?)를 헤아려볼 수 없는 수 많은 인간들이 지구(地球)상에 출생되어 살다가
그만 모두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희망찬 21세기 새 아침을 맞아
지구상에 거처하는 인간만도 60억이나 된다니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 중에는 동방(東方)에서
제일 큰 자(者)일 뿐 아니라, 순전(純全)하고 정직(正直)하여 하나님 경외(敬畏)하여 악(惡)에서 떠난 자로 명성(名聲)이 높은 우스 땅 사람
욥과 같은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이 있는가 하면, 나의 젊은 시절에 철없이 날뛰던 것과 같은 한심(寒心)한 인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많은 자녀(子女)들이 그 가는 길을 다 아시며, 또한 적절(適切)한 단련(鍛鍊)과 같은 시련(試鍊)을 통해
정금과 같은 축복(祝福)을 안겨주시는 것이다. 그때 욥은 말하기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까지 선포(宣布)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욥과 같이 위대(偉大)한 인물에 한(限)해서만, 정금같은 축복(祝福)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일반자녀들에게도 똑같은 사랑과 공평한 단련과 시련을 통해 정금 같은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당하게 주시는 것이다.
이 사실은 지난 날 저자의 형편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위에서도 수차례 언급(言及)함 같이 우리 가정은 뜻하지 않은 나의 신병(身病)으로 인해 온 가즉들이 실의(失意)에 빠져
아무 의욕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병을 유일한 시련으로 삼아 입산기도의 문(門)을 열어주심으로 인해, 그 결과 욥에게 못지않는
진리의 정금을 찾게 되어 감사하며 그에 따른 시대적(時代的) 사명감(使命感)에 불타고 있을 뿐이다
사랑의 상호성에 대하여
본시(本是) 나는 너무 부족한 인간이라. 남과 같이 깊은 기도의 세계에서 기도는 못했으나 제주(濟州)에서 6개월,
관악산에서 3년, 도합 3년 반 동안이나 세월을 낭비(浪費)하면서 기도생활이라 했는데, 산중(山中)에서는 복음주의 신앙에 대해, 특별히 깨닫게 되었고,
최근에는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애절하게 호소하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 크게 사명(使命)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제1차 입산 오십 일째 되던 날에는 복음에 제일 요소(要素)인 보혈(寶血)을 체험(體驗)케 하시더니,
제7차 마지막 입산 50일에는 복음의 제2요소인 그리스도의 대의에 대한 진리를 자신있는 체험적 지식으로 남달리 받게 되어 나도 모르게 사이에
자연 신앙의 자고심(自高心)마저 생겨 나만이 복음주의 신앙을 바로 찾았고,
바로 가르칠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는 교만을 갖고 남모르게 수년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1996년 전 김포시 운양리 성창마을로 이사하여, 오후3시면 근처 야산에서 중언부언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하루는 기도 중 감(敢)히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큰 의문(疑問)과 곡해(曲解)를 갖게 될 뿐 아니라,
나의 신앙생활에까지도 일대변화를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말씀 한마디로
온 우주(宇宙)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자시라면 왜? 하나뿐인 독생자를 희생시켜서만 온 인류(人類)를 구원하셨을까?
독자 희생 외(外)에도 얼마든지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하필(何必)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희생방법을 적용(適用)하여 인류구원을 계획하셨던가?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사용(使用)하게 된 이유(理由)는
첫째 ... 주님만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의 몸을 빌어나심으로 자연히 원죄(原罪)가 없으신 까닭이요.
(기타 모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아담의 후손(後孫)으로 원죄를 갖고 있음으로 타인(他人)을 위해 죽을 자격도 없고, 죽는다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인류(人類)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시는 중대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리 무지몽매한 인간이라고 해도 자기(自己) 같이 더러운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심으로 자기들이 구원됨을 확실(確實)히 알게 된다면 그 누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견딜 자 있으리요?
▣독자를 희생시키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사랑을 더 요구하신 까닭이다.
사랑은 전인류가 크게 떠들어대는 문제이나 아직도 참사랑을 바로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고
과연 사랑의 근원지(根源地)가 어디며, 사랑은 과연 어디에 속(屬)해 있는 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分明)한 것은 사랑은 언제나 상호성(相互性)을 갖고 있어 일방적(一方的)으로는
사랑이 완전히 성립(成立)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쪽이 사랑을 주면, 다른 쪽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한쪽도 사랑을 줄 때에만 완전한 사랑이 성립되어 양자(兩者) 간 서로 행복을 누리게 되는 법(法)이다.
사랑의 속성(屬性)에는 이 같은 철칙(鐵則)이 있어 항상(恒常) 양쪽의 합의(合意)가 필요케 되는 것이다.
만약 어느 한쪽이 열렬(熱烈)한 사랑을 요청(要請)해도 한쪽이 불응(不應)시는 그 사랑은 성립될 수 없고, 이런 사랑을 세상에서는 “짝사랑”이라고 부른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은 내심(內心)에 고통과 번민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통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성공(成功)시켜 보려고 온갖 노력(努力)과 방법을 다해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사랑의 신(新)이라도 인간들이 사랑에 대한 호응(呼應)이 없이는
짝사랑이란 일방적 누명을 면(免)해 볼 길은 없다. (천계의 사랑을 속세(俗世)의 말로 표현해 죄책감도 들지만 사랑의 상호성(相互性)으로 보아 불가피한 일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세계에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고충도 있을 것이고 인간들의 사랑을 그렇게까지 애타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本體)시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요일4:8-16>라고 했지만,
완전한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자연 인간들에게 사랑을 바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강조(强調)하며, 또 그 기대(企待)는
과연 어느 정도(程道)인지, 몇 사람의 실례(實例)를 들어 따져보면서 여러분의 신앙 참고(參考)로 드리렵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27>고 하셨고,
또 부활하신 후 디베라 바닷가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고 세 번씩이나 반문하심은 주님 사랑하시는 일이
얼마나 중대(重大)한 일이며, 또한 인간들의 사랑을 시급(時急)히 재촉하는 뜻이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최후 순교한 사랑의 사도(使徒)가 아닌가!
창세 이래로 하나님께서 직접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행13:22>고 증거해 주신 사람은
다윗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7계를 범(犯)했고,
그 남편 충신(忠臣) 우리아를 위함한 전장으로 몰아넣어 죽게 한 살인마가 아니던가? 물론 나단 선지의 책망을 받고
철저한 회개는 있었으리라 믿으나 그런 다윗을 증거까지 하신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남다른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내재(內在)해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은 그를 위해 장엄한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하였으나, 그는 평생에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므로
그 손으로 지은 성전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사랑하는 심정으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전 건축활 내 아들 솔로몬은 나이 어리고 연약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전(殿)은 극히 장려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대상22:1-5>
그러므로 내가 죽기 전에 더욱 힘을 다해 모든 건축 재료들을 준비(準備)해 놓아야 하겠다면서 아무도 감(敢)히 셀 수 없을 만큼
금, 은, 동, 철, 목재, 석재를 준비해 놓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다윗의 사랑을 보시고
만족하셔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을 합(合)한다”고 하신 것이다.<행13:22>
감리교 창설자(創設者)인 요한 웨슬레는 꿈속에서 천사를 만나, 가톨릭 신자는 몇 사람이나 천국(天國)에 왔느냐고
물은 즉 천사(天使)는 책을 뒤적이더니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장로교인수를 물으니, 역시(亦是) 장로교인도 없다는 것이다.
좀 이상(異常)한 생각이 들어서 감리교인에 대해 물어보니 감리교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왔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천국(天國)에는 가톨릭도, 장로교인도, 감리교인도 없고 오직 하나님 사랑하는 사라들만이 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하늘나라라는 곳은 사랑의 상호성 원리(原理)에 따라 사랑하신 하나님과 또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던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 양자(兩者)가 최고(最高)의 영광(榮光)과 행복(幸福)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곳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오늘과 같이 내심(內心)에 하나님 사랑은 없고 자신의 축복과 명리(名利)만을 위해 다니는 신자라면 특별(特別)히 명심해야 할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眞理)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願)하시느니라”<딤전2:4> 말씀하셨다면
우리 개신교도들은 개신교(改新敎)의 생명인 복음신앙을 굳게 지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모두 하늘나라에 참예해야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랑을 더욱 원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전에도 하나님 사랑함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고, 요리문답 제1문에도 사람이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수많은 인류구원방법을 다 포기해 버리시고, 사랑하는 독자(獨子)만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케 됨은 오직 인간으로부터 참된 사랑을 받으시려는 의도(意圖)뿐이었음을 우리는 특별히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이같이 기독교(基督敎)란 창조주(創造主)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모든 인간(人間)들은
자신들의 구원문제에만 관심(關心)을 가질 뿐, 근본(根本)문제인 “하나님 사랑”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시대(時代)가 된 것 같습니다.
저 아시스의 성자(聖者) 프란시스는 길을 가다가도 정오(正午)만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太陽)을 바라보면서, 저 태양이 불타는 것같이 주님의 불타는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기도하더니 급기야(及其也)는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받은 다섯 상처를 그도 받아서, 주님의 고통과 사랑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해(害)치던 사나운 이리도 회개시켜 유순(柔順)한 개와 같이 되게 해, 2년 동안이나 여러 집을 다니면서
얻어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말도 우리는 듣고 있다. 그뿐 아니라 공중에 새들과 물 속의 고기들까지도
그의 명(命)을 순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세계적인 사랑의 사도(使徒)가 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상기(上記)한 프란시스의 사건(事件) 같은 것을 통(通)해서도 귀한 교훈(校訓)을 찾아볼 수 있으니,
즉(則) 프란시스의 간절한 정오(正午) 기도는 헛되지 않아 결국(結局) 우리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받았던 저 유명한 다섯 상처를 받아,
주님이 당(當)한 고통과 그 깊은 사랑을 몸소 체험케 되니, 주(主)님에 대한 프란시스의 사랑은
최고절정(最高絶頂)에 이르게 될 뿐 아니라, 인간들은 물론(勿論)이요, 동식물계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사랑의 성자(聖者)되게 된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聖徒)들은 누구나 다 창조주(創造主)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의무(義務)와 사명(使命)을 지고 있는데,
이 중차대(重且大)한 사랑을 어떻게 해야만 실천(實踐)해 볼 수 있는 신자(信者)가 되어볼 수 있을까? 그럼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위에서 말한 프란시스에게서 솔직히 배워 실천해야 할 것이다.
(마치 철없는 어린 것이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케 됨은 먼저 그 지극한 어머니의 사랑을 잘 알고 있기 때문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케 되는 비결(秘訣)
첫째... 먼저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잘 알아야 우리도 그를 사랑케 될 것.
둘째... 항상(恒常) 기도생활을 통해 사랑하는 주(主)님과의 뜨거운 교제(交際)가 식지 않도록 노력(努力)해야 될 것.
저자(著者)는 모태(母胎)로부터, 진실한 신앙가정에서 출생하였던 관계로 여러 선조(先朝)님들이 주일(主日)이면 교회에 모여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에도 때로 참석해 보았는데, 그때 교회라야 겨우 30평정도 밖에 안 되는 T자형 건물(建物)로서, 내부 중앙에는 남녀가 서로 보이지 않도록
흰 휘장을 길게 쳐 있었고, 오전 예배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70세)께서는 기쁨에 못 이겨 대중(大衆) 앞에
나서섯 춤을 추시는가 하면, 남자 노인석(勞人席)에 앉아 계시던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집에서 귀하게 키우던 송아지를 사랑하는 교회에 바치신다는 말씀이셨다.
그때 그들의 얼굴은 정말 기쁨과 사랑이 넘쳐 흘러 현세(現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때 과연 하늘 보좌(寶座)에 좌정하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세월은 덧없이 흘러 벌써 80여년이 지나버렸지만 오늘의 교회는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으며, 그 무엇이 변(變)해졌던가요?
곳곳에는 화려한 맘모스교회들이 하늘높이 솟아 그 위세(威勢)를 자랑하고 있으며,
교인수(敎人數)는 천만 명을 훨씬 넘어, 선교사상 유례(類例)가 없다고 뽐내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엄숙(嚴肅)한 의식(儀式)들은 모든 식전(式典)을 더욱 빛내고 있으며 교회 모든 시설들은 모두 만전(萬全)을
기(期)하듯이 완전무결의 상태(狀態)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變化)이며, 발전(發展)입니까?
그러나 옛 우리 선조(先朝)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던 그 아름다운 기쁨과 사랑은 다시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주(主)님은, 일찍이 젬마갈가니와의 대화(對話)를 통해 비장한 어조(語調)로, “내 마음은 항상 아프구나!
종일(終日) 나 혼자 이 성당(聖堂)에 적적(寂寂)히 있으며, 때로 사람들이 모인들 나를 사랑함보다 다른 동기(動機)로 오는 것이며,
이 집이 이같이 다른 목적으로 이용(移用)되다니, 나의 아픔은 말할 수 없다.
감(敢)히 모령성체(冒領聖體)하는 위선자(僞善者)들이 많음을 보는 내 심정(心情)이 어떠하겠느냐?”
젬마는 그만 우소서, 차마 더 못 듣겠습니다!고 달랬습니다.
여러분, 그 무엇이 우리 주님을 그렇게 고독하게 했으며, 그를 울리셨나요!
교회가 없어서도 아니요, 교인수가 적어서도 아니요, 엄숙한 의식(儀式)이 부족해서도 아니라,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모두 자기 명리(名利)만을 위해서 교회에 교회에 출입(出入)하는 자들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각별히 유의(留意)하여 하나님이 소원(所願)하시는 대로 “하나님 사랑”을
전반신앙생활에 기본목표로 정하고, 참사랑은 자기 이(利)를 구(求)치 않는다는데, 우상(偶像)과 같은, 자기 명리(名利)는 흘러간 역사(歷史) 속에
깊이 깊이 묻어버리고 21세기 새아침부터는 “하나님 사랑”만을 참된 신앙으로 알고 매진합시다.
< 시와 노래들 -산중기도생활에서 기록한- >
내가 자란 고향은
뻑국새 울어대고 살구꽃 피든 ... 그곳이
마을마다 그네매고 씨름하며 와글댈제
가당잎 양산삼아, 시골아씨 구경찾든 ... 그곳이
솔깡불 뜰에 놓고 동네여인 모여들어
내기 삼을 삼어대든 ... 그곳이
집집마다 물네 놓고 밤늦도록 왱왱소리
한냥 주고 사온 소설 등잔밑에 모여 낮아
닭 우는 줄 몰라가며
청을 노아 읽으면서 웃고 울던 ... 그곳이
바로 38이북 철산(鐵山)이란 내가 자란 고향이며
가진 우상 모셔 놓고 소와 돼지 바쳐가며
일심(一心)정력(精力) 하던 끝에
우리 원수 마귀 쫓겨 가기는 예수 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새로운 복음의 소식이 이 마을에도 우려오사
어둠에서 자던 잠을 깨어 일어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 대대손손 시봉(侍奉)케
되었으니 이 가정이 바로 나를 낳고
주의 법도를 키워주던 나의 보금자리였다.
물욕(物慾)
옛날에 사랑을 속삭이던 물욕의 임(任)은
나를 버리고 한마디 인사도 없이
영원히 허무의 세계를 가고야 말았다.
그가 주던 달콤한 위로 그 기쁨 그 오아시스
지금은 아득한 추억만이로구나.
그 아담한 반양식건물 너는 얼마나 나를 즐겁게 했으며
나는 너를 영구히 즐기고저 기념촬영까지 함이 아니던가
그 논밭만이 부(富)의 진리라고 구가(謳歌)받든 너는
진리 아닌 공산주의 아래 정죄를 받고야 말았구나.
헛된 물욕의 날, 세상을 다 얻을 듯이
동분서주 오늘의 적수(赤手)가 그의 열매든고?
오! 허무한 물욕! 너는 얼마나 수억만의 창생을 속이며,
짓밟는 무서운 요마(妖魔)이냐!
정욕(情慾)
젊은 시절에 나의 옥좌(玉座)를 마음껏 즐기던 정욕의 임아
꿈의 찬란한 수레를 타고 너 간곳이 어디인고
사망의 대가(代價)를 주고간 너는 또다시 누구를 달래는고?
밉살스런 야속한 너의 사랑,
누구의 왕관(王冠)을 받으며 아양을 떨어 메는고
나는 너 하나만을 만족시켜 보고자 갖는 전력 다 받쳐서
나의 단장 나의 동작 나의 사상,
그 어느 것이 너의 희생의 제물 아님이 있었던고?
슬프다! 인생의 젊은 꽃을 꺾는 잔인한 정욕의 요녀(妖女)야
개창속에 비참히 떨어진 옛날의 꽃한송이
지금은 정욕의 잔인을 울어 메노라
교회생활(敎會生活)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가되
세세에 있어 빛나는 네 이름은
주를 찾는 교회생활 신앙이라지
너는 알 듯 모를 듯 있을 듯 없을 듯
알락 달락 네 이름 아니던가?
사람 생명 진리 거룩 이것들은 너의 별명(別名)이요
교만 시기 위선 가증 허영만이 너의 본명(本名)이지
이것이 신앙의 본질(本質)이라면, 가는 세상 허무타는 정욕보다
더! 흉악(凶惡)함이 교회생활 아니런가?
깊도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기이한 경륜(經綸)과 그 오묘한 행사(行事)는
가히 찾아 측량키 어렵도다!
당신의 손이 한번 들어 나의 무릎을 꿇게 하시니
나의 비참과 허물인 신신앙을 보게 되었나이다.
지난 날의 나의 허수아비생활, 용납할 수 없는 가증
사나운 개같이 지저대던 나의 입술
비리새의 의(義)도 없는 나의 바리새의 교만
당신 현전(現前)에는 참된 겸손만이 설 것을 찾았나이다.
오! 당신만이 진리시오 생명이시며
세세토록 찬송을 받을 진실자(眞實者)로소이다. 아멘
관악산 연주대
관악산 높은 봉은 연주대되여
천고에 주를 찾아 애타는 봉(峰)되고
국수봉 높은 위엔 촛대가 빛나니
천연(天然)의 기도 터가 이 아니던가?
한(韓)나라 중심부에 삼(三)천 정보(町步)의 터를 잡아
이루어진 관악산이라면
삼(三)천리강산 안에 삼(三)천만 겨레를 상징(象徵)함이요
하늘높이 솟아있어 만고에 부동(不動)함은
이 민족의 신앙(信仰)정기(精氣) 틀림없구나!
관악산아! 네 이름 신기하구나 과녁이라지
너는 과녁을 쏘는 선수(選手)관악산이라면
참된 진리의 과녁을 쏘아 맞침도
너의 손만이 가능할 것이리라
오! 관악의 소리 한 번 발하면
만민들은 기뻐 찬송할 것이며
천지는 이 놀라운 진리에 화답하리라
이길 수 없는 고독
서산(西山)에 해 넘어
산 그늘도 침울(沈鬱)하면
뭇 새들은 깃을 찾아 지저대고
초부(樵夫)들은 총총히 집 찾는데
산봉에 우는 부엉새 소리만이 구슬피 들려
집 못 가는 이내 설움 돋어만 대는구나!
겁(怯)에 고개 올라서니 고독령(孤獨嶺)은 어이할고?
가다 못내 가겠거던 울어라도 가리이다.
물리쳐라 버혀라, 긷독고 본(本) 삼아
일편단심(一片丹心) 찾아 보라 때는 절박하구나!
탑골을 지나
1. 탑골을 지나 관악산 가도
사랑의 주님 따라가니
세상의 영화 세상의 부귀
날 속인 것을 깨달았네
(후렴) 하늘에 영화 하늘에 기쁨
나의 마음 속에 차고 넘치네
사랑의 주님 날 찾아오니
이것이 천국이 아닌가
2. 제주도에서 붙잡힌 이몸
도망질 치던 요나일세
고기의 뱃속 삼(三)일에 삼(三)야
관악산 훈련 과목이라
3. 먼 동이 트는 바위 틈속에
꿇어서 앉아 훈련이요
손수 밥지어 부엌틈에서
식탁(食卓)의 훈련 받는구나
4. 찬송가 펴서 주 영광 찾고
성경에 진리 오묘로다
때 찾아 오는 번민의 고통
주님의 훈련 솜씨로다
깨꼬질 노래
1. 천지는 변해도 그 말씀 불변해 찾으면 만날 줄 쉽사리 믿고서
좋다는 세상도 향락의 단꿈도 버린지 어시호 삼(三)년이 지났네
2. 봄바람 가을비는 내 한숨 내 눈물 흰구름 백설은 애타는 내 심정
애타서 불러도 울어서 찾아도 대답이 있을 듯 없을 듯 야속타
3. 사랑의 주라더니 무정한 그대요 위로의 주라더니 울리는 그대라
아니라 아니라 그대의 사랑은 편협한 인간은 그 사랑을 몰라요
4. 그리운 당신은 밤이나 낮이나 날 찾아 오것만 내 눈을 가리워
보아도 못 보게 들어도 못 듣게 그대의 깨고질 사랑이 아니냐
5. 깨꼬질 싫다고 시침을 떼고서 나갈 길 간다고 나무래 보지요
갈라면 가보렴 갈 곳이 어딘가 주님의 그 빈정 억센 사랑이라
6. 깨꼬질 가정은 우리네 신가정 그리워 불타워 사랑의 신가정
아버지가 즐기는 겸손의 도덕도 깨꼬질 가정에 길이 길이 빛나리
7. 앞집의 신부도 뒷집의 신부도 그 사랑 잃고서 울어만 댄대요
깨꼬질 가정엔 이별이 없대요 우리네 가정은 깨고질 가정이라
술람미 여인의 노래(1)
봄(春)
당신은 나의 짝! 나의 사랑이지요!
나는 당신을 그리워 하는 술람미 처녀!
지면에 꽃은 피고 뭇새들이 우는 봄이 되면은
당신의 백합같은 거 얼굴 보고지여
짝 잃은 두견(杜鵑) 새로 당신을 찾아 울어맺지요.
여름(夏)
당신은 선한 목자! 나의 사랑이지요!
나는 당신을 그리워 하는 술람미 처녀!
만화방초 우거지는 여름 동산 속에
양떼를 부르시며 이리떼를 쫓아내는
당신의 소리 듣고지여 당신을 찾아 헤맸지요.
가을(秋)
당신은 추수하는 농군(農軍)! 나의 사랑이지요!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술람미 시골아가씨
무르익은 저 곡식은 가을비로 재촉하는데
낫을 들어 거두시며 단을 묶어 세우시는
당신의 그 모습이 보고지여, 거친들로 헤맸지요.
겨울(冬)
당신은 농장주인! 나의 사랑이지요!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술람미 주부(酒婦)
알곡은 모아 곡간 안에, 쭉정이는 불에 던져
공로(功勞) 따라 주심보다, 사랑으로 셈을 보니
당신의 그 사랑이 보고지여 눈보라쳐도 찾아 헤맸지요.
술람미 여인의 노래(2)
꽃을 웃기는 봄바람이 불어지는 봄 날에도
흰구름은 뭉게뭉게 다기봉(多岐蜂)을 이루는 여름 날에도
궂은 비 내리며 낙엽(落葉)이 불리는 가을 날에도
북풍한설(北風寒雪) 산넘어 재우쳐 불어오는 겨울 날에도
그리워 그리워 당신을 불러 찾았건만
무정하게도 당신은 어이 안오시었단 말가
꽃피고 새우는 봄바람에 취(醉)해져 나를 잊었음인가
그럴리 없다면은 목양(牧羊)에 틈이 없었음인가
추수에 배 바뻐 틈이 없었음인가
셈을 보기에 틈을 얻지 못함이었든가
아니라 아니라 당신은 무소부재시오
무소불능이시며 무소부지이시라
나를 잊을리 없아옵고
나를 찾아 오지 않을리 없아오리
가나안 여인의 노래
1. 오래전 선지자 예언하든
메시야 우리 주 오셨건만
시기와 질투에 불타는 랍비들
주님 책잡으려 뒤따르네
2. 예루살렘에서 배척받고
나사렛 고향서 쫓겨나신
최후의 사업지 가버나움까지
원수들의 손이 뻐쳐 든다.
3. 십자가의 죽엄 멀지 않고
제자들의 사명 걱정되여
고국을 떠나서 두로와 시돈에
향(向)하신 우리 주 외로워라!
4. 두로와 시돈에파도소리
이역(異域)에 풍경을 자아내고
패역한 세대에 참믿음 보고져
머-나먼 이국(異國) 땅 찾아오네.
5. 허다한 무리들 구름같이
가나안 한 여인 애타 불러
다윗의 자손여 불상이 보소서
사귀들린 내 딸 구하소서
6. 피어린 호소도 못들은체
철 없는 제자들 달래맨다
이스라엘 집에 잃은 양 찾고져
개 같은 네 딸은 모른다고!
7. 무정과 멸시에 실망 않고
끝가지 도움을 바란 여인
네 믿음 크도다! 네 소원 이루리
주님의 그 만족 한량없네.
8. 가나안 여인을 본 받아서
우리도 그 뒤를 따라보세
잠잠과 멸시는 이루워 주시는
기도의 응답에 과정(課程)이라!
기도하자
1. 구하시면 주시마고 찾으시면 만난다고
두드리면 열어주리 진실하신 주의약속
믿지않어 기도않고 응답없다 낙심하며
주신복락 받고서도 알지 못해 우는구나
2. 산과들을 헤매시며 피와 땀을 자아내어
기도로써 본을 보여 기도하라 하신말씀
잊지말고 기억하세 본을받어 기도하세
주님제자 되는길은 이길밖에 없답니다.
3. 애탄부탁 듣고서도 몸소 본을 받고서도
휴지같이 버린교회 채직분이 기다린다
기도하는 집이여늘 강도굴혈 웬말인가
갖는 매매(賣買) 갖은짐승 몰아내고 기도하세.
4. 죽을 야곱 살게됨이 얍복강에 기도라면
죽을 자신 바라보며 어이탄식 할것인가
세상영화 월천(越川) 시켜 환도뼈가 상키까지
제단 뿔을 뷔여잡고 새이름을 얻어보세.
5. 국가민족 한탄말고 삼팔선을 두려말고
르비딤에 모세같이 기도팔을 들어보자
모든 제단 썩었다고 백만성도 타령말고
가멜산에 내린불을 기도로써 끌어보세
6. 내 남편과 내 자녀를 걱정하며 울지말고
기도없는 내 자신을 가슴치며 울어보자
밤이오면 낮이오고 죽은후엔 부활이니
용사들아 일어나세 새벽종이 울려온다.
신부가
1. 독생성자 혼인(婚姻)기약이
이미 차서 가까오니
세상처녀 물색(物色) 중에
내가 뽑힘 받았구나
2. 나의 사랑 그대 얼굴은
볼 수 없는 절색미남
많은 처녀 물리치고
나를 택함 왠일인가
3. 나의 옷이 누추하고
내얼굴이 못났건만
이제라도 내 옷벗고
내 얼굴을 단장하리
4. 율법거울 앞에 놓고
애써 단장 하여보니
웬일인가 하면 할수록
누추한 꼴 더하누나
5. 못난 신부 기막혀서
쓸어지며 울어델제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
네 신랑은 미용사(美容師)다
6. 미용사인 그대 어셔서
겸손으로머리단장
사랑으론 눈을 그려
주의 피론 연주 찍네
7. 생명수로 목욕하고
세마포옷 받아입고
그 손맡겨 화장(化粧)하니
절색가인 신부로다
8. 나를 보는 모든 세상은
우습다고 조롱해도
우주창조 주인공은
나를 사랑하신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