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감사
2022년 9월 18일 주일낮 예배
성경 : 고린도후서3:1-5
제목 : 존재와 감사
존재와 감사는 이번 성지순례 중에 생각난 설교주제입니다.
꿈은 의식의 연장이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출발한지 몇 일 되어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기억하고 있는 설교 제목이 존재와 감사였습니다.
꿈속에서는 은혜가 되었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주 설교제목을 꿈에서 본대로 존재와 감사로 정했습니다.
철학의 3대 분야는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입니다.
존재론은 존재가 무엇인가? 실존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식론은 존재 즉 대상이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고 가치론은 19세기 이후에 이전 가치체계의 붕괴를 경험하면서 존재와 인식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가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개념들인데 저도 잘 모르고, 제가 존재와 감사에서 사용한 존재는 다만 현재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입니다.
존재들은 서로 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영향들이 감사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감사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고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고린도는 현재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바울이 주후 50년 경 2차전도 여정을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면서 인근해 있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아시아로 가려 했으나 주의 영이 허락지 않으시자 갈라디아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디모데가 선교 일행에 동참하게 되었고 드로아에서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인이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함을 보고 사모드라게 섬과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이르러 첫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이어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어서 베레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렀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2:3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울은 혼자였고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얼마 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되었고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사도행전18:9-10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심에 용기를 내어 11절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하였습니다.
고린도라는 존재는 두렵고 떨리는 이유가 되었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주님의 환상과 말씀의 존재가 바울에게 감사가 되어 고린도교회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주후53년에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주후 55년경에 에베소에서 기록한 바울의 편지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교회 안에 파당의 문제, 도덕적 윤리적 문제, 교회의 일을 가지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 성찬에 대한 문제, 예언과 방언을 비롯한 은사에 대한 문제, 부활신앙에 대한 이견 문제 등이 있었고 더하여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들로 인하여 바울이 편지를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이고 그래도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더 심해져간다는 말을 듣고는 친히 고린도 교회를 찾아가기까지 하였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그 후에 말하기를 고린도후서10:10에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낙심하고 돌아온 바울은 그래도 다시 간절함과 강경함으로 편지를 써서 디도를 통해 보낸 것이 소위 고후7:8에 언급된 준엄한 편지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감사하게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그러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번 성지순례중에 저희 차에 서울동북노회 김풍호목사님이 타셨습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안면이 없던 분이었고 공항에서 처음 뵈었는데 등에 만다린을 메고 계셨습니다. 이 여정에 뭐 이런걸 메고 오셨나 의아했었는데 이분으로 인해 그 악기로 인해 길고 고된 여정에 많은 찬양을 할 수 있었고 말도 재미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세상을 노래하며 하시면서 찬양도 했다가 가요도 했다가 하셨는데 악보도 없이 수 십 곡을 인도하셔서 어떻게 그렇게 찬양을 잘하시냐 물었더니 자기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이 김두환 작곡가 였다고 하였습니다. 김두환 작곡가는 한국 교회음악에 있어서는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얼마 뒤에 그만 두었어” 하시길래 왜 그리 되었냐 물었더니 실력은 있었지만 교사 자격증이 없어서 그리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시점에서도 자격증에 해당하는 추천서가 필요했다는 것인데 그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당신들의 존재가 나의 추천서입니다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당신들의 존재가 나의 추천서 역할이 될 것입니다 하는 감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나무랄 때에 뉘 집 자식이냐? 호통을 치시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품행이 반듯한 자녀들로 인해 그 집안 어른들이 인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존재는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영향이 순방향일수도 있고 역방향일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로 인하여 감사하게 된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저희 차에 울산에서 오신 정영협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노회장이 아니었는데 친구 노회장 목사님 사모님이 못 오시게 되어 대신 오신 분이었습니다. 이 여정이 끝나갈 즈음에 차에서 엽서를 돌렸습니다. 저는 받으면서 좋은 경치를 담은 엽서가 있어서 기념으로 나누시는 모양이다 하였는데 뒷면 가득 손 편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복사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여행하면서 그래도 저에게 좋게 여길만한 내용을 적으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은혜의 초대 감사합니다. 낄 수도 없는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늘 목사님과 사모님 함께 영상을 찍는 모습들이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노회를 염려하는 모습도 참 귀한 본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목회 복된 가정으로 그 은혜 성도들에게 흘러넘치길 기도합니다. 성지순례길에서 정영협목사 올림.
요즘 손 편지를 받아본 적도 없고, 이러한 상황도 이례적이었지만 그 분의 존재로 인하여 모든 일행들이 감동을 받았고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순례 내내 저희들을 안내하였던 여행사직원이 있었습니다.
여행 일을 한지는 10년이 넘었고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직업상 봉사는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 분이 여정의 끝에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여행업에서도 3D 분야가 있는데 신혼여행과 개별여행과 성지순례라 하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지순례 하는 분들이 왜 그러냐 물었더니 실제로는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성지순례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믿음과 직분이 꽤 있는 분들인데 특히 권사님들과 신학교 교수분들이 어렵고 상처도 많이 받았었노라 하였습니다. 그래도 일로 여기고 혹은 사명으로 여기고 더 수입이 나는 소위 팩키지 여행을 마다하고 주로 성지순례자들을 안내하는 일을 계속해 왔는데 이번 노회장님들과 함께한 11일의 여정에서 많은 위로와 소망을 받았노라고 하는데 한편으론 부끄러웠고 한편으론 감사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함이 서로에게 감사가 된다면 참으로 복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에서는 현지 안내자로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나오셨는데 아주 활달하고 재미있고 박식한 분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사도 요한이 유배되었던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계시를 받았던 밧모섬에 갔을 때는 그 남편 되시는 선교사님이 안내와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분은 다소곳하시고 말도 천천히 조용히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대화중에 이 분이 “저는 이곳에 선교사로 온지가 30년이 넘었는데 사실은 선교사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믿는 자로 살았습니다” 하셨고, 사모님이 “그러면서도 가정경제에 도움이 된 적이 없다” 하시자 “그래도 가끔은 있었다” 큰 소리로 항변하였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어 잘 크고 그리스 며느리도 얻고 손자도 보고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거실에 있는 아들 지갑에서 100유로 지폐가 탐이나 몰래 빼어서 갖고 있다가 추궁하는 아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얘기도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얘기로 웃으면서도, 낯선 타인에 대해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분의 존재가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게 해주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역사가 들어 있는 튀르키에와 그리스 땅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로마제국과 이슬람의 무게를 견디어 내며 어떻게 심어졌고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었는가를 보여주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존재들을 찾아가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박해 시대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갑바도기아 지방의 데린구유는 박해를 피해 땅속으로 들어간 이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고,
괴레메 지역의 동굴들의 존재는 히브리서11:38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들의 흔적을 나타내는 존재들은 그 시대 비잔틴 제국 내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과 현재 이슬람 속에서 사라진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은 박해시대에는 박해로부터 피난의 흔적을 평안의 시대에는 영성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흔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투르키에 길리기아 갈라디아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에 이르는 2만여 킬로미터의 길을 걷고 또 걸어서 때로는 배를 타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발걸음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는 일입니다.
그리고 묻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세 종말의 시대에 기독교의 어떤 존재들을 이 땅에 남기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이 건물일수도 있고, 기록일수도 있고, 찬양일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존재들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