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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조회 : 176
  • 성경말씀 : 마가복음 11:1-6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3-27

 

2022년 3월 27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가복음 11:1-6

제목 :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오늘 말씀은 종려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간의 첫날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며 호산나를 외치었기에 후에 종려주일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출발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셨다가 데가볼리를 거쳐 요단강 동편으로 내려 오셔서 여리고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과 2km정도 떨어진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 비해 벳바게와 베다니는 가난한 자들의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갑자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먼 거리를 제자들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아주 가까이 두고 말도 아닌 나귀를 타고 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가져오라고 제자 중 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이 둘이 누구였을까요? 적어도 가룟 유다나 도마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방금 예수님과 갈릴리로부터의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를 끌고 오라 하시며 누가 너희에게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는 말씀에 말없이 즉시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 비용을 치르고 그리하라 하셨으면 모를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만으로 그 일을 감당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는 이 일이 어떤 상황이었을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배경으로 예수님은 그 나귀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 하면 허락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이기는 한데 그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전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 이 나귀 주인과 미리 약속을 하시며 그 암호를 주가 쓰시겠다하라로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주로 기록하였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유대 예루살렘 사역도 기록해 놓았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장소가 유대광야 지역이었고, 공생애 첫 해에 성전청결 사건이 있었고,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있었으며, 아리마대 요셉과의 관계,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와의 관계는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예루살렘 지역으로도 여러 번 오셨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가능은 한 경우이지만 예수님께서 미리 약속을 해 놓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이 나귀는 한 해 전에 예비된 나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전 500년부터 예비해 놓으신 나귀였습니다.

주전 500년 전에 스가랴라는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임할 왕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탈 것이라 하였습니다(슥9:9).

스가랴가 예언한 공의로운 자, 구원을 베풀 자, 겸손한 자가 자신임을 알리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제자들이 가보니 나귀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오며 주가 쓰시겠다 하자 나귀의 주인은 순순히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린 일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자신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땅에 던졌더니 4:20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어린 아들과 살고 있던 여인이 있었는데 흉년이 심한 때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여인에게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쿰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하17:12) 하자,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였습니다.

여인이 그리 하였고, 그 후 여호와께서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벳새다 들녘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을 때에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안드레에게 나아 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것이 없음으로 인해 걱정하는 대화를 이 아이가 들은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빈 그릇에다 축사하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나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에 축사하셨고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심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분도 넉넉했을 때가 아니라 아주 어려웠을 때 수중에 남은 모든 것으로 교회의 한 부분을 수리한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를 모형적으로 계시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였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님께서는 미리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것들을 사용코자 하실 때가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게 될 때 그 때를 위하여 예비 된 달리 표현하면 주님께서 예비하여 놓으신 것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없는 것을 쓰시겠다 하시지 않으시며, 내게 쓰시겠다고 하는 것들은 이 때를 위하여 내게 예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스더4:14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니 네가 왕후의 자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있는 그 무엇을 쓰시겠다 하실 때 선한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거룩한 노동입니다.

노동은 힘이 들지만 보상이 있는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새벽기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새벽이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새벽기도에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달리 교회 청소를 하는 분이 정하여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당을 여전히 성전이라 고백하고 또한 주님의 몸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 청소만큼 경건의 훈련에 좋은 일도 없습니다.

그래도 주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한 번 청소는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토요일 오후 3시에 주일을 위한 교회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 일이 가능한 분들은 주가 쓰시겠다 하시니 하시기 바랍니다.

헌금도 주가 쓰시겠다 하시며 우리에게 맡기어 놓으신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마6:21)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선교관에 우크라이나에서 18년 동안 사역하셨던 홍윤주 선교사님이 와 계시는데

우리 교회가 지난번에 어려운 중에도 우선해서 선교헌금을 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의 믿음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랜 기간 동안 새신자가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구원의 믿음을 쓰시고자 보내시니 나귀를 끌어오기 위해 맞은 편 마을로 갔던 두 제자와 같이 그렇게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에 관한 말씀을 조금 더 드리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맞이하는 두 무리가 있었습니다.

한편은 여러 가지 이적과 특히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보고는 예수님을 그 날에 임할 것이라 예고된 메시야로 생각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며 예수님을 열열이 환영하던 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예수님의 권세와 인기를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예수님과 심지어는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애석하게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고 영접하고자 하던 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바랐던 메시야의 역할이란 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하며 살았던 다윗 솔로몬 시대와 같은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실적인 구원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을 탓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586년에 나라가 망한 이래 계속해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설움과 핍박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기원전 142-63년까지 79년 동안 하스모니안 왕조로 잠시 독립을 이루기는 하였었지만 이내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어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나타 나셨으니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까지 길에다 깔며 외치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군중들이 바랐던 구원과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이 다른 것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온 세상의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현실적 구원의 당위성과 요구가 절실하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 즉 우리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실적 구원에 집착한 신앙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하여 나타난 대로 끝내는 다 예수님을 떠나가고 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보면 예수님을 오해한 저들은 같은 입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으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똑같이 호산나 즉 우리를 부디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지만 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온 세상의 구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다윗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재현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땅끝까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모르는 자들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먼저 믿은 우리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를 위해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현실적 구원에만 매여 있는 무리들, 게다가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는 또 다른 무리들을 주님께서는 민망한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바라는 구원도 물질로부터의 구원, 건강으로부터의 구원, 어려운 상황으로부터의 구원, 나만의 구원만 바라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주님께서 민망히 보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이적은 믿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지 이적이 목적은 아닙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말씀을 감사와 영광으로 알고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인색하지 주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우리에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바로 알고, 바로 영접하고, 바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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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가 쓰시겠다 하라
  • 2022-03-29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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