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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 성경말씀 : 누가복음19:28-40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03-29

2020329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 19:28-40

제목 :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구약성경에 사람이 타는 짐승 중에 말과(수스) 노새와(페레드) 나귀가(하모르) 있습니다.

말은 주로 평지에서 빠른 이동이나 군사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홍해에서 추격해 오다 멸망당한 애굽 군대에 대해 미리암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움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습니다. 말은 애굽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노새는 말과 나귀의 잡종으로 산악지형에서 나귀보다 귀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귀는 평민이, 노새는 주로 왕족이 이용하는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사환들이 그 분부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사무엘하 13:29)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노새도 아니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성경에서 130번 언급되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굽이 작고 뾰족해서 말보다 발걸음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의 울퉁불퉁한 산악 지형에서 이동하기에 더 적합한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도 세고 지구력도 있어 75kg 정도 되는 짐도 운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도 말구유가 아니라 나귀의 구유였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전쟁, 정복자, 교만 등인데 반하여 나귀는 겸손과 순종,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고 있으며, 말은 이집트로부터 수입한 동물이었으므로 일반 가정에서는 나귀를 기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이 있는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지내시고 주일 아침 제자들과 길을 떠나 인근에 있는 벳바게에 이르셨습니다.

벳바게는 무화과의 촌이라는 뜻으로 무화과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당시 무화과는 가난한 이들의 양식이기도 했습니다.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을 시키실 때에 둘씩 보내셨습니다.

그러하니 우리들도 주님의 일을 함께 할 둘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말 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은 무리 라는 뜻이지 한 개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도서4: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하셨습니다.

혼자서는 사단 마귀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빌게이츠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묵상한 글에 코로나19는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 일을 두 제자들에게 맡기시면서 나귀 값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주가 쓰시겠다하라고만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 단락의 여러 상황들을 살펴보아도 주님께서 왜 이리 말씀하셨는지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남의 것을 이토록 하신 일이 없으시고 그러실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나귀의 주인과 미리 거래를 해 놓으신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좀 더 묵상을 해 보면 우리 선생이란 뜻의 랍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잘 사용하시지 않은 호 큐리오스 즉 주라 하신 것을 통해 자신이 온 세상의 주 되심을 드러내신 계시적 선포로 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아무 말 없이 갔고, 나귀의 주인들도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고 인정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이러한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두 제자의 입장이었을 때도 그러하고 우리가 나귀의 주인일 때에도 그리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첫째는 구약 예언의 말씀의 성취적 의미가 있습니다.

스가랴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의 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심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참으로 왕 중의 왕이시며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자 라는 것을 구약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다윗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재현해 줄자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맞추어서 겉옷을 어린 나귀 위에 걸쳐 놓고 길에 펴기도 하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호산나를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당연히 볼 수 있었을 것을 그들은 끝내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였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신 것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곧 자신이심을 보여 주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남긴 그 유명한 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신 말씀을 이 계시적 사건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은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가까운 길입니다. 굳이 나귀를 타고 가실 길이 아닙니다. 그것도 성인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다는 것은 평상시라면 절대 그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을 때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 하신 것으로 보아 실제로 예수님은 다소 왜소하셨을 것으로는 여겨집니다- 이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습에서 그 무겁고도 무거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는 듯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무게로 인하여 아버지여 할 수 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셨고 십자가에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셨습니다.

대속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런 일인지는 우리가 남의 잘못 허물을 어쩔 수 없이 조금이라도 대신지게 되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오해나 불이익을 당해도 도저히 못 견뎌하며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 되는 일인지를 경험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셋째는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그 나귀 새끼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을 태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져야 할 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하신 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일 것입니다.

우선은 십자가 없이 빈손으로 가는 길은 나귀 새끼의 길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교회생활 하면서 아무 부담이 없다면 그것은 빈등으로 가는 나귀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누가복음9:23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현재의 코로나19도 우리가 지고 가야할 짐입니다. 외면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많은 이들이 질문을 하고 나름대로의 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답은 한 가지인데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상반되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쉽지만은 안은 일입니다.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린 일일수도 있고 모두가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린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말씀에 대한 정직을 가지고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서로를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코로나19 이후의 교회도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교회란 나와 분리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이 머리 되시고 우리가 각 마디로 연결된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의 교회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적 표현으로 하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신 의미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심히 훼손되어 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일에 우리가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입니다.

 

다음 주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주일에 이르게 됩니다.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를 타시고 앞서서 가시는 주님을 똑바로 그리고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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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 2020-04-03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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