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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화평하게 하는 교회

  • 성경말씀 : 마태복음 5:9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7-01-08

성경 : 마태복음 5:9

제목 : 화평하게 하는 교회

라르쉬 공동체란?

라르쉬 공동체는 1964년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뢰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과

장 바니에(Jean Vanier)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 라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운동과

'가장 작은 자'에게서 예수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사랑과 영성은 헨리 나웬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오늘날 라쉬는 전 세계 28개국에 103

공동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장 바니에는 라르쉬의 설립자로서 1928년 캐나다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출생했습니다. 해군으로 근무하다가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프랑스의 정신 요양원을 방문하여 정신 지체 장애인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교수직을 사임하고 프랑스의 트로즐리에서 두 장애인들과 라쉬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라쉬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례가 있는데 재닌이라는 여성입니다.

40살에 재닌이 라르쉬공동체에 왔을 때 그는 왼손 왼다리가 마비였고 간질을 앓고 있었으며 학습능력과 이해력이 아주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동생의 가족과 함께 살다가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자의반 타의반 공동체로 오게 된 경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증오하였고, 동생을 질투하였으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공동체에 들어와서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하지를 못했고 분노하며 지냈습니다.

그에게는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옛 프랑스 노래를 알고 있었고 그 노래들을 흥얼거리고 있을 때 다른 공동체원들이 그 노래를 좋아해 주었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 주었고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고 더 들려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3년은 아주 아름다웠었다고 다른 이들이 회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삶도 환대 받으며 살아가는 곳이 라쉬 공동체라 합니다.

현재 우리는 수 많은 이기의 통신 장비와 시설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불통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많은 장벽에 갇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말미암는 외로움이 아프게 찔러오고 있습니다.

자아의 분열도 심각합니다. 이중인격 다중인격 현상으로 인해 혼돈과 곤혼스러움을 겪고 있습니다. 삶이 두려워지기 시작하였고 버겁기 이를데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자신의 삶이 인정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하는 강박증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라쉬 공동체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며 이 시대에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교회가 할 일입니다.

주보 칼럼란에 기록된 내용들은 라르쉬 공동체의 가치를 장 바니에가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화평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다른 사람을 내가 정한 화평으로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질서라 부르는 것이 평화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4. 평화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속도와 싸워야 합니다.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5. 상대방을 인정할 때 그가 변하게 되며 그가 변함으로 내가 변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6. 화평하게 하는 자는 타인에 대하여 당신이 있어서 기쁨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7. 우리가 우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싸움을 벌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과 싸우지 않으려면 보다 근원적인 정체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정체성에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집니다.

나와 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

 

라르쉬 공동체의 화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있고 봉사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가 다 서로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느린호흡과 기도와 축하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도 상대방을 존재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이삭이 믿음이 그러하였고 리브가의 믿음이 그러하였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대도 그들의 불화는 한 집안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민망하고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과 특별한 섭리 가운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삭의 자식들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성경에서 화목한 가정의 예가 아주 드�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어떻게 화해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그의 고난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을 한 번 속였지만 그는 밧단 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열 번이나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편 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상대편의 입장에 서 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입장을 떠나 상대편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스스로 하기는 힘들고 억지로 그리되는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하여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게 됨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얍복강에서 그는 천사와 사력을 다하여 씨름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깨달은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에서와의 화해의 강을 건널 수 있는 계기를 부여 받습니다.

기도는 의무고 습관이고 능력이고 신비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 억지로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후에도 야곱은 에서의 위험 앞에 라헬과 요셉을 맨 나중에 두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도 400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울었습니다.

야곱은 이르기를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33:10) 고백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리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의 마음을 만지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전까지의 과정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평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사탄 마귀의 속성은 언제나 같습니다. 세상을 온통 불화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거짓과 이간질과 두려움을 그 무기로 사용합니다. 사탄 마귀의 영이 광풍과 같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악에 대하여 뱀처럼 지혜롭게 대항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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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평하게 하는 교회
  • 2017-01-12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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