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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긍휼한 마음

  • 조회 : 36
  • 성경말씀 : 히브리서8:12
  • 설교자 : 방영철목사
  • 설교일 : 2023-07-09

 

 

202379일 주일낮 예배

성경 : 히브리서8:12

제목 : 긍휼의 마음

 

서른 살의 청년이 인터넷에 쓴 글입니다.

낮에는 도서관에 가 있고 저녁이 되면 집에 와 저녁을 먹고 자기 방으로 가는 취준생인데 그 날은 어머니가 모임이 있다고 저녁은 부자간에 알아서 하라 하였기에, 은퇴자인 아버지가 배달음식을 시켰습니다, 30분 쯤이면 올 줄 알았는데 전화를 해 보니 이미 출발하였다 합니다, 초인종은 그로부터 30분쯤 뒤에 울렸습니다. 그 한시간 동안 아들은 아버지와 있는 것이 너무도 어색해서 어찌할 줄 몰라 긍긍하고 있었기에 문을 열면서 화를 내려고 한 것인데 배달원이 온통 비에 젖어 있었고, 오다가 빗길에 오토바이가 넘어져 수습하고 오느라 이렇게 늦어져 죄송하고, 음식도 섞이게 되어 환불해 드릴 것인데, 그래도 필요하실지 몰라 가져왔노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뒤에서 아버지가 그 청년에게 우리가 이 빗속에 배달을 시켜 미안하다 하시며 그 상황에서 음식을 가져다 주어 저녁을 굶지 않게 된 것도 감사하다 하시며, 음식값 환불받을 생각 없고, 적은 금액이지만 마음으로 받아 달라고 지갑에서 얼마를 주는 것을 자신이 보며 생각이 많았다고 쓴 글을, 어느 분이 신문에 측은지심의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옮겨 왔습니다.

그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 각박한 시대에 측은지심을 보았노라 함이었습니다.

측은지심은 맹자가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함께 이것이 인, , , 지이며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며, ‘무측은지심이면 비인야라 하였습니다.

맹자의 측은지심이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긍휼과 같은 맥락이 있습니다.

1976년에 출판된 리처드 디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는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힌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날 인간의 삶은 이기적 유전자들의 결과이다 라는 주장을 하였고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2007년 요아힘 바우어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을 썼습니다. 그는 디킨슨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의 상호보완성이 오늘의 인간 세상을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논지에는 긍휼이 들어 있습니다.

 

18장에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16년 동안의 품값에 해당합니다. 그것의 1만배는 계산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기에 이와같은 빚을 지게 된 것일까요?

; 임금이 이 종에게 베푼 긍휼의 크기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고 불쌍히 여김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긍휼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값이 이와같다 하심으로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고백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왜는 그는 빚진 동료에게 이같이 하였을까요?

; 그는 임금과 자신과의 관계를 잊어버리고 자신과 동료와의 관계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에서 그같이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긍휼은 임금으로부터 온 것이지 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 잠언 11:8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하였습니다. 타인에게 사랑과 긍휼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음은 그런 유익의 상실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10장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한 사람이 심한 부상을 당하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음에도 지나가는 이에게 도움을 청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자비 곧 긍휼을 베푼자라 하시며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내가 강도 만난 자에게 가는 자이지만, 어느 날에는 내가 강도 만난 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 누군가가 나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긍휼을 베품은 현재의 이웃을 살리고 미래의 나를 살리는 일이고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구원받을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로 읽기 쉽습니다.

로마서 9:15-16에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셨습니다.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달음박질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개념에 구원이 포함되어 있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가장 불쌍한 자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문자 그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라면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게 됩니다.

긍휼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의 긍휼은 인간이 칭찬을 받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드러나는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입니다.

나함, 엘리오스로 표현되는 긍휼은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일반적인 도덕이나 윤리의 행함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긍휼을 애매한 개념 혹은 도달하지 못할 단계 혹은 종교적 권위주의의 틀에 두려 함이 아니라 긍휼이 긍휼 되게 함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긍휼에 대해서 바울은 이와같이 경고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이는 그 긍휼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함을 밝힌 것입니다.

긍휼의 시작도 긍휼의 기준도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에는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자비로운 선택과 결부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우리가 타인을, 특별히 원수까지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부르심이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의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나의 판단도 아니고 상대방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에만 근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잠언 17:3도움이 필요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의 창조자를 멸시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자세는 단순히 그 당사자와 결부된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면에서는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히8:12의 말씀에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하셨으니 이는 새언약으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말씀의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새언약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그로인해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긍휼은 라함에서 나온 말인데 라함은 자궁입니다.

자궁 안에 있는 지극히 무력한 한 생명을 향한 마음이며,

한 자궁에서 태어난 자들이 서로를 향한 마음입니다.

죄에 종노릇하고 있는 현상의 본질을 볼 수 있음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여기에 원수까지도 긍휼이 여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죄를 미워할 수 있음입니다. 또한 아직도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이기도 합니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봄으로 나오는 행동입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춤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상황을 봄으로 나오는 행동입니다.

나의 판단도 타자의 상황도 아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위로하는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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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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