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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성찬에 참여하는 자

  • 조회 : 91
  •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11:27-34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7-10

 

2022년 7월 10일 주일낮 예배

성경 : 고린도전서11:27-34

제목 : 성찬에 참여하는 자

 

고린도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애찬식과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애찬식은 친교의 식사를 이르는 말이고 성찬식은 성례전을 이르는 말입니다.

애찬식은 교인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에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은 일입니다.

지금도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고 주일 예배에 올 때 각자가 음식을 준비해 와서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은혜도 있다고 합니다.

저도 어느 교회에서 그렇게 준비된 애찬식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음식들이 서로 같지 않고 다양한 것들로 풍성한 나눔을 경험하였던 것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처음에는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거듭되면서 문제점들이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음식을 싸온 사람들과 싸오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진 일이었습니다. 얼마 동안은 음식을 싸온 사람들이 싸오지 않았거나 못 싸온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을 터인데 나중에는 그들은 배제하고 싸온 사람들끼리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취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시장하였다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좋은 음식을 싸온 사람들끼리면 모여서 먹고 허름한 음식을 싸온 사람들은 그 모임에 들지를 못하게 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려웠던 때 학생들 중에 도시락에 계란이나 쏘세지가 있으면 당당하게 내놓고 모여서 먹었는데 김치만 싸온 아이는 구석에서 혼자 먹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1:22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구역별로 점심을 준비하는데 이런 문제가 생겨나더라도 고린도교회의 전철을 밟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있어 문제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그러한 문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일입니다.

 

성찬식의 기원은 유월절 만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에 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고 힘을 얻어 새로운 여정을 감당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그 날은 요일로 하면 금요일이었고, 전날 저녁 목요일에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만찬 중에 세족식도 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던 중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 즉 무교병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성찬식이 애찬식과 구분이 되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거나 성찬식의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찬을 단순한 음식으로 보거나 아니면 제물과 같이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제물이라 함은 마치 부적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를 먹으면 병이 낫는 다거나 귀신이 접근을 못하게 된다거나 신령한 기운을 갖게 된다거나 하는 생각입니다.

번역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기억으로 이것을 행하라 하심입니다. 

우리의 성경대로 읽는다면 성찬은 기념설에 가깝게 이해될 것입니다.

스위스 쮜리히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는 성찬의 의미를 기념에 두었습니다.

반면에 루터는 성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재하신다고 믿었고, 천주교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체는 눈에 보이는 떡이나 포도주가 모양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 알갱이가 바뀌는 것으로의 표현입니다. 

깔뱅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쯤에 있는 주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 속에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깔뱅의 신학은 우리 교단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성찬은 제물이 아니며, 기념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향해 내 몸이라 하심과 잔을 향해 내 피라 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 하며,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성찬식을 집례하다 보면 성찬을 안 받겠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짐작컨대 그 동안 나의 삶이 성찬을 받기에 도저히 합당치 않아 그리하겠노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 생각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럼에도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죄인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살과 피를 다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성찬 앞에서 자기 의를 생각하며 성찬 받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그 거룩한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이냐가 중요한 일입니다.

어떠한 믿음과 결단으로 성찬에 참예코자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성찬은 단순한 떡과 잔이 아니며 기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를 위해 상하신 주님의 몸이요 흘리신 피이니 그것이 헛되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심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과 이 잔을 마심이 과거의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삶에 있는 일들입니다.

성찬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가 받은 문화충격 가운데 우유를 욕조에 채워 놓고 목욕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하루에 몇 모금씩만 마셔도 살 수 있게 하는 우유를 한 순간의 피부관리를 위해 그 큰 욕조에 가득 채워 놓고 몇 번 몸을 담근 다음에 하수구로 버린 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해보니 물이 아주 귀한 지역, 한 통의 물을 위해서 몇 시간씩을 물통을 이고 지고 가야하는 이들이 보기에 제가 먹을 수 있는 수돗물로 샤워하는 것을 본다면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심정으로 볼 수 도 있겠다는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들이 들면 대책 없는 마음의 불편함이 얼마간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천장에 있는 에어콘을 네 대 가동해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에어콘을 가동하지 않으면 더위와 습기로 인해 예배드리기에 몹시 불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에어콘 한 대를 켜는 것이 선풍기 50대를 동시에 켜는 것과 같은 전기를 사용합니다. 에어콘은 2000W, 선풍기는 고속으로 가동했을 때 40W 정도입니다. 지금 네 대를 켰으니까 선풍기 200대를 켜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금으로 보면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지금도 쪽방에서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나며 그것도 전기요금 때문에 마음 놓고 켜지도 못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 전기가 만들어지기 위해 생성된 이산화탄소는 지구의 온난화를 재촉하며 전 세계에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밥값은 하고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0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유로 목욕을 하며 산다면 그만한 값은 이웃과 세상에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수돗물로 샤워를 하며 산다면 그만한 값은 이웃과 세상에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선풍기 200대를 켜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만한 값은 이웃과 세상에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물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산다면 그만한 값은 이웃과 세상에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함석헌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둘 중의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면 그는 다른 이의 삶도 함께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듣는 자들은 듣지 못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농아분의 간증을 들었는데 설거지를 한참 하고 뒤돌아보니 어린애가 침대에서 떨어지며 물건에 부딪혀 얼굴을 피투성이가 되어 있더랍니다. 분명히 아이는 사력을 다해 울면서 도움을 청하였을 터인데 본인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그리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농아인들은 아이의 손과 자신의 손에 끈을 매놓고 지낸다고 합니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은 황홀한 일입니다.

걷는 자들은 못 걷는 자들을 대신해야 합니다. 배운 자들은 못 배운 자들을 대신해야 합니다.

힘 있는 자들은 힘 없는 자들을 대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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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사는 값이 26절에 주의 죽으심 즉 그가 죽으심의 의미 즉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그가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전달 될 수 있게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음주부터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회 여름 수련회를 하는 것도 그의 죽으심으로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직접적으로 충성하는 교사들이 있고 우리들도 기도와 물질로 도우려 하고 있습니다.

선교관에 계시는 선교사님들을 돕는 것도 우리가 직접 땅끝으로 갈수는 없지만 그분들을 섬김으로 땅끝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을 기억함으로 주의 성찬에 자기를 살피고 합당하게 참예하는 것도 그의 죽으심을 나 자신에게 전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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