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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영광과 욕됨

  • 성경말씀 : 고린도후서 6:3-10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9-04

 

2022년 9월 4일 주일낮 예배

성경 : 고린도후서3-10

제목 : 영광과 욕됨

 

제 중학교 1년 후배를 신학교에서 만났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10여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다 보니 낯설고 놀랍기도 해서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냐? 형이 어떻게 왔냐? 서로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하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인데 신학교에 가면 이 분이 어떻게 신학교에 왔을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천국에 갔더니 꼭 만날 줄 알았던 분을 못 만나기도 하고, 도저히 못 만날 줄로 여겼던 분을 만나기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후배는 대학 때부터 집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학교를 다녔고 신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차산에 비닐 움막을 만들어서 지내기도 하였고 기숙사에 빌붙어서 지내기도 하며 어렵게 학교를 마쳤습니다. 전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자 얼마 후 베트남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태권도 유단자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권도 도장도 차리고 해서 지금은 유치원 사역과 국제학교 사역 등으로 후원이 없어도 자립선교를 할 수 있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 해외선교에 있어 특별한 경우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아서 노회로 인해 한국에 올 때 보면 안쓰러운 면이 있어 언젠가 운동복을 사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후배가 운동복을 받으면서 고맙다고는 하면서도 “형, 너무 애쓰지마, 내가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바울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하여 남긴 말들은 우리들에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교회 교육관 주차장 벽에 노아의 방주가 그려져 있고 방주에 노아테바 라는 히브리어가 적혀 있습니다.

그 당시 노아는 배를 본적도 없었을 것이고, 비를 맞은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다 그 큰 방주를 만들라 하심을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터인데 그 방주를 무려 120여년에 걸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믿음은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가리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6:9)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과 함께 살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무말 없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번제할 준비를 하여 이삭을 데리고 삼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습니다(창22:5). 이삭에게는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하였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우리가 가 없었는데 개역개정에서 우리가를 포함시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우리가 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말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하였는데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후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였습니다.

 

성경 히브리서는 모세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하였습니다. 믿음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부인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하며 강권하였을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코람데오’, ‘신전의식’,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을 때에 그의 큰형 엘리압은 노를 발하며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이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하였고, 골리앗도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며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삼상17:43-44) 하였지만,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와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하며 단지 물맷돌을 들고 나아가서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믿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한 여자아이가 아람군대에 노략을 당해 나아만의 집에 노예가 되었는데 나아만이 나병환자인 것을 알고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더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왕상5:3) 하였습니다.

이 말은 쉬운 말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 고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가 원수이지만 불치의 병자에 대한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긍휼함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노략되어 온 아이지만 그동안 그 아이의 삶이 여주인이 보기에 신뢰할 만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불행을 당한 여자 아이였지만 그 안에 이와 같은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긍휼함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온 몸에 나병이 퍼진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기회를 찾아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 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1:41) 하셨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던 연고였습니다.

믿음은 간절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하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됨으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대적하여야 할 이름이었지만 이후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누구보다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 아라비아에서의 3년 길리기아 다소에서의 얼마를 거쳐 수리아 안디옥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주후 47년경에서부터 주후 68년경 순교할 때까지 20여년의 삶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살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가 2차 전도여정 중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두렵고 심히 떨리는 가운데도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에게는 추천서가 없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자비량 선교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 하는 등 의심하고 비난하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변명 중에 한 부분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이전의 사울이었다면 한 순간도 감당하지 못하였겠지만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됨으로 이와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위한 변명을 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 자신에 대한 비방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직분이 비방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해 왔다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일꾼으로 스스로를 여기며 환란과 궁핍과 고난 가운데서도 견디어 왔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으며 돌에도 맞았고 갇힘을 당하였고 난동을 당하였고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온갖 수고로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 더러움 가운데 있지만 깨끗함을 지켜왔고 하나님의 지식을 잃지 않았으며 오래 참고 친절하고 성령님의 감동가운데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살아왔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 하나님의 공의와 정이를 왼손과 오른손에 가지고 싸웠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욕됨을 피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욕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그 일을 자원하였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우리는 악한 이름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누군가가 보기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그렇지 않고 참된 자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 이름을 인정해 주지 않으나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소망이 없는 자 같으나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음을, 징계를 받아 죽을 것 같지만 주님의 손이 우리를 보호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다른 이들이 보기에 우리에게는 근심 밖에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복의 근원이신 주님의 부요하심이 우리의 손을 통하여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고린도 교인들이여 당신들도 우리와 같기를 원합니다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특히 바울의 삶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주 오래전 나와는 연결고리가 희미한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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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과 욕됨
  • 2022-09-06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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