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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오직 성경으로

  • 성경말씀 : 로마서1:16-17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9-10-27

성경 : 로마서 1:16-17

제목 : 오직 성경으로

믿음의 과정에서 두 단계가 있습니다.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이고 믿을 것이라 하면 이대로 믿을 것이냐 더 잘 믿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은 이대로 믿을 수는 없다 더 잘 믿어야 한다는 결단들이 모여진 운동이었습니다.

주후 64년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간 때인 로마 황제 네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용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 중단 되었습니다.

주후 379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화 시켰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갔으며 지상뿐 아니라 황제의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핍박받던 종교에서 핍박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양적으로 팽창하였고 모든 교회당이나 예배 형식들이 화려해졌고 교회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중세 천년의 이 기간 동안 기독교는 발전한 면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부패하고 변질되기도 하였습니다. 14세기 초에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1320년경 ~ 1384)가 이러한 교회에 대한 개혁을 선포하였습니다.

루터가 95개조를 주창한 때가 15171031일인 것과 비교해 볼 때 무려 200년이 빠른 시기입니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그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추구했던 개혁의 근본이었습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이나 교회가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의 부정을 옹호하는 식의 전통은 결코 성격적이지 않다고 역설합니다. 또한 그 어떤 권위보다 성경이 우위에 있으며, 교황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교황제도는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1215년 가톨릭교회가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확정한 화체설을 부정합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을 미신이나 가현설과 다르지 않으며, 성육신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당대로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적지 않은 권력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까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결국 옥스퍼드는 1381년 경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1384년 위클리프는 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대립교황이던 요한 23세는 위클리프의 개혁을 이어받은 체코의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위클리프를 부관 참시하여 그의 저작들을 함께 화형식을 거행합니다.

중세 천년동안 교회는 타락하였고 사제들은 무지하였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는 많은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신학과 철학의 변화, 교회의 타락에 더하여 또 하나의 휘발성 물질이 중세 역사 위에 뿌려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습니다. 지동설을 이론적으로 주장(1543)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뒤 흔들어 놓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고 교인들이 그 시대의 과학에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는 일입니다.

또한 농업 중심의 경제는 십자군 운동 등을 통해 상업 위주로 전환하게 됩니다.

농업은 한정된 지리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상업은 이동을 통해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14세기에 대발견시대 또는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철학적, 지리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와 발전은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던 가톨릭교회를 조금씩 허물어갔습니다.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끌고 갔던 때는 신앙적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앞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2년 전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도사인 마틴 루터는 그의 나이 34세인 15171031일 독일 마인츠의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마인츠의 신임 대주교를 향해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붙였습니다.

면죄부는 교회와 교황이 정한 법에 죄를 지었을 때 교황의 처벌을 면해 주는 것인데,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면죄부라 하지 않고 면벌부라 합니다. 이 면죄부를 왜곡하여 돈을 받고 온갖 죄를 사해 주는 증명서인 것 같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면죄부 판매자 였던 테첼의 표현대로 동전이 궤짝에 짤랑하고 떨어지면 영혼은 그 즉시 연옥에서 천국으로 간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면죄부를 파는 자와 사는 자의 욕구가 만나서 이루어낸 결과물입니다.

테첼과 마인츠 대주교는 95조 반박문을 떼어서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95조 반박문은 당시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전된 인쇄물로 인하여 전 유럽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당장 루터를 파문하고 책벌하고 싶었지만 교황권이 약화되어 있었고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정치적으로 루터를 쉽게 처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카예탄 추기경을 특사로 보내 루터를 심문하고 회유하려 했지만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회가 아닌 성경이어야 한다고 반박하였습니다.

루터는 교회와 교황이 면죄부에 대하여 무어라 하든 자신은 성경에 근거해 볼 때 자신의 주장이 옳으므로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뉘우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3대 정신 중에 하나인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루터가 사역하고 있었던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을 위한 기도 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루터는 로마서1:17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의는 심판하고 정죄하고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었는데

탑의 체험이후 루터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의 였습니다. 이 의를 통하여 죄사함과 구원이 가능한 의 였습니다.

에베소서2:8에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사랑가운데 이루어 놓으신 의로서 루터는 이것을 오직 은혜라 하였습니다. 교회의 전통이나 예식 성자들의 공덕 등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외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은 이 하나님의 의 즉 오직 은혜를 나의 것으로 하는데 있어 오직 믿음이 있을 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면죄부를 삼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고행이나 공덕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가톨릭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오랜 역사 속에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에 인간의 욕심이 덧붙여지거나 섞여지기 시작하였고 그것들이 부패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부패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후 16세기 종교개혁이 진행될 당시 유럽은 참된 신앙이 회복되리라는 열정으로 가득 찼었으나 기대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사단과 마귀가 부패한 교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앙대신에 교조주의가 열정대신에 광신이 가득차기 시작하였습니다.

가톨릭파 루터파 캘빈파 성공회파 급진종교개혁파 등이 자신들만이 정통이며 다른 곳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7세기 이 시기를 정통주의 시대라 하는데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교조주의와 광신은 종교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물론 전쟁의 주 원인과 목적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가톨릭이 개신교를 핍박하는 구조를 갖는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전쟁, 영국의 청교도전쟁, 독일의 30년 전쟁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너무도 잔혹한 이 전쟁을 겪으면서 종교에 대한 혐오감이 표출되었고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입각한 새로운 신념체계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18세기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유물론 진화론 등이 등장하였고 교회는 또 다른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주의,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구하는 신비주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려 했던 경건주의 등의 경향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이 당시 가톨릭은 보수적인 신학적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었고,

개신교는 새로운 상황을 인정하면서 그 가운데 자신의 전통적인 신앙체계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19세기는 폭발적인 선교의 시대였으나 식민지 쟁탈전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20세기는 1차대전, 파시즘, 나치즘, 2차대전 등을 경험하면서 인간을 통한 구원이라는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고 신에게로 돌아서게 되었는데 그 형태는 종교다원주의였습니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하여 각국어로 미사를 허용하였고, 동방교회와의 화해를 이루었으며, 개신교를 형제교회를 여겼고, 타종교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현재의 한국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교회들은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의 종교개혁을 더 이상 부각하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연합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외에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의 역사를 통해 주어진 교훈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는 교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청결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재발견되고 재해석된 의미를 더 깊이 깨닫고 그 진리를 지키며 전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핍박받고 순교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개혁운동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자기만을 고집하고 상대를 부정하는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어야 하며 초대교회가 그러하였듯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자들 편에 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세지말에 열방을 영육간에 먹여 살릴 수 있는 이 한국교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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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직 성경으로
  • 2019-11-01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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