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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울며 씨를 뿌리는 자

  • 성경말씀 : 시편126:1-6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9-08-11

성경 : 시편126:1-6

제목 : 울며 씨를 뿌리는 자

우당 이회영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감리교를 다니고 있었다. 1905년에 을사늑약 체결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무효화 하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6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600억원)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 자신도 행동대원 이었다.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순국하였는데 이때가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1117일의 일이었다.

대의를 쫓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다른 형제들도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11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혁명가, 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육이오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하였고 1953년 사망하였다.

 

이완용은 18586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원군 집안으로 양자로 가서 13세때 명문가문인 조병익(趙秉翼)의 딸과 혼인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임금 가까이에서 지내며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3월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 최초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고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의 독립사상과 근대문명의 발달을 경험하는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라는 세계 흐름과 힘의 논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6211일 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건 주모자들은 친일파 세력을 몰아내고 내각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1896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위원장, 부회장 및 회장직을 맡았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신정치운동을 표방하는 데 앞장섰고, 고종의 환궁운동을 전개하여 실현시켰다. 이후에는 국내외 정세 변화와 함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다.

19059월 학부대신이 되어 9년 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에 앉았다. 같은 해 1117,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고종의 강제양위, 한국군대의 해산, 의병들을 중형으로 처벌하는 일, 사법권 양위, 한국은행의 감독은 일본인으로 하는 법 등을 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19091222일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 좋게 살아났다. 19108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냈다. 이에 마침내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고 경술9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6211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다.

 

매헌 윤봉길은 1932년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한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 본명은 우의, 아호는 매이며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1918년 덕산 공립 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1932년 봄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해 4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서 물통폭탄을 단상에 던져 일본의 군부와 관부 인사들을 사상시켰고 현장에서 체포된 후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의 나이 25살에 사형 당했다. 이 거사는 그 당시로는 꺼져가는 촛불과 같았던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광복때까지 항일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거사를 계획하던 중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6원을 주고 시계를 새로 구입했는데 김구 주석과 마지막 만남의 장소에서 윤의사는 자신의 새 시계를 김구 주석에게 내 놓으며 김구 주석의 헌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자신의 시계는 이제 한 시간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니 그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김구 주석의 시계를 차고 갔고 김구 주석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순국하실 때까지 윤의사의 시계를 간직하게 되었다.

이 두 시계가 2006년 김구 주석 탄생 130주년 기념 유물 특별전 때 나란히 전시되었다. 후일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 약속이 74여년 만에 지켜진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왜 가인은 가인의 길을 가고 아벨은 아벨의 길을 간 것일까요?

독립운동을 택한 분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가 많은데, 친일을 택한 이들의 생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단순히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에 무슨 미련이나 소망이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차라리 일제의 지배 아래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갖은 자들은 자신의 몸속에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다시 태어난다면 일본인으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러하니 그들의 친일적 삶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문제가 전혀 없을뿐더러 오히려 요청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선일체가 되어 황국신민으로 살기를 분명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고자 했던 곳에는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어리석은 욕망이 있었을 뿐이었고 끝내는 비참함만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성경은 이기주의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무시하지는 않으나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두 발은 이 땅의 나라에 딛고 살아가며 머리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는 주후 426년 어거스틴이 그의 명저 신의 도성에서 언급한 바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게 하셨지만 그것은 가나안 땅에 살던 칠 족속들의 죄가 관영한 연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땅에서 살 자격을 상실하게 되자 바벨론의 침략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70년의 연단의 과정을 거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꿈꾸는 것 같았고, 입에는 웃음이 혀에는 찬양이 찼었다고 합니다.

뭇 나라들도 이 일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광복도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셋째는 이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갔던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나라 이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갔던 분들이 있었던 것이고, 그 열매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의 독립이 외세에 의한 것이다는 주장은 지나치고 작위적입니다. 우당 선생 일가가 그러하셨고 윤봉길 청년이 그러하였고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으셨거늘 감히 누가 그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나라 이 민족과 열방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하여 울며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 이 민족 열방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날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행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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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3
  • 방영철
  • 1
  •  울며 씨를 뿌리는 자
  • 2019-08-11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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