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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벳바게에서

  • 성경말씀 : 누가복음19:28-40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9-03-31

성경 : 누가복음 19:28-40

제목 : 벳바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단지 3년이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주 사역지는 갈릴리 지역이었는데 우리나라로 하면 평안도 함경도 정도입니다.

대략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현재의 서울 정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삼년 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 길의 끝에는 골고다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전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길을 가실 수 있었을까요?

갈릴리의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역사가 있었고, 사마리아에서는 나병환자들을 고치셨고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여리고에서는 삭개오의 영접을 받으셨고 그 집에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고 있었습니다.

오늘 28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저들의 질시와 배척과 핍박과 폭력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 후에 부를 찬송의 첫줄 가사가 오 영원한 내 주 예수 앞서서 가시니 이 날의 주의 승리는 영원 무궁하리입니다.

찬송을 부르시는 중에 앞서서 가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예루살렘을 향하여 저 골고다를 향하여 저 천성을 향하여 앞서서 가신 주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순종함으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습니다.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이고,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이 산은 감람 나무가 많아서 이 이름이 생겨졌고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 건너 편에 있는 산으로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거리(2km 1:12)로 해발 약 800m의 높은 산입니다. 이 산에 오르면 예루살렘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이 산에서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고, 이 산에서 멸망해 갈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시며 기도하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보시면서 입성(入城)준비를 하셨습니다.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안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일까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미리 이 계시적 사건을 위해서 나귀를 준비해 놓으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귀 주인과의 약속이 이전 언젠가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귀 주인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나귀를 풀어 가려 하자 당연히 어찌하여 푸느냐 하였을 것인데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 하자 그 순간에 감동이 와서 그 계시적 사건에 쓰임을 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라 하여도 이 나귀는 이미 주전 400년 전부터 예비 된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코자 하셨습니다.

주전 400년 경의 선지자 스가랴 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지금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내어 놓는 그 무엇이 지금 당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히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때를 위하여 그 어느 때부터 예정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이 내가 소유한 그 무엇이든지 아니면 나 자신이라 해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말씀이 들려오는 것이고 그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과는 달리 나귀는 작은 동물입니다. 그런데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라 하였으니 더 작은 크기일 것입니다. 그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 태우고 간 것입니다.

37절에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하였는데 높은 감람산에서 저 깊은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는 과정이 있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과정이 있는 길입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복음서라 할 수 있는데 그 길을 직접 함께 갔던 베드로의 전언이 아니었다면 마가가 이렇게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시대에 필요한 때에는 그 계시의 나귀새끼가 되어 주님을 태우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터입니다.

나귀새끼도 이렇게 하였고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는데,

우리는 그저 주님의 등에 업혀 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로 가시는 주님을 조금이라도 태우고 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굳이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그 길을 가시는 것은 당연히 편히 가고자 하심이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그 메시야로 가고 있음을 알리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나귀는 짐을 운반하는 동물이지 사람이 타고 가기에는 적당한 동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심은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나귀에 의해 운반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귀의 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놓았고 다른 이들은 그 가시는 길에 펴 놓았습니다. 그것은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예식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리하였습니다.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였습니다.

그들의 외침과 찬송은 진리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타고 계신 것이 개선장군의 군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라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면 그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41-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볼 수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하였던 이들은 몇 일 지나지 않아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달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앞서서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을 태우고 감람산에서 기드론 골짜기로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나귀 새끼를 봅니다.

그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주님을 봅니다.

호산나를 외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탄식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바로 보고 바로 외치며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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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벳바게에서
  • 2019-04-05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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