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주일오전 1부 예배

 

속죄의 본질

  • 성경말씀 : 요한복음19:28-30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8-09-30

성경 : 요한복음19:28-30

제목 : 속죄의 본질

너 왜 교회 다니냐 물으면 많은 이들이 마음이 편해서 라고 대답해 왔습니다.

그것이 틀린 답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는 엄청난 보석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사단 마귀를 물리치셨고, 자신에 관한 결정적인 진리를 계시하셨고, 인간을 포함해 만물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해 병든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해 주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게 하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셨습니다.

이 일들의 중심에 속죄가 들어 있습니다.

속죄라 함은 죄가 사하여 졌다는 것이고 그 결과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해함에 있어 세 가지 이론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승리자 그리스도론이고, 둘째는 형벌 대속론이며, 셋째는 치유론입니다.

형벌 대속론은 오늘 한국교회가 대부분 이해하고 있는 속죄론입니다.

역사적으로는 11세기 이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근세에 까지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봉건제도와 민족국가의 법치제도가 성립되면서 그 배경으로 이해된 속죄론입니다.

로마서4:25에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하신 말씀 속에 그 뜻이 들어 있습니다.

치유론은 인본주의 속죄론이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그를 바라보는 죄인들의 심령에 변화가 생겼고 그 힘으로 우리 앞에 이미 와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심입니다.

근대 이후에 더욱 관심을 갖는 속죄론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관점의 속죄론이 있는데 모두 다 그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속죄론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승리자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속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기독교의 처음 천 년 동안 초기 교회의 속죄 신학을 지배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하심이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사탄에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졌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계관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다툼이 있는 우주라고 보았으며,

예수님께서도 사탄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하셨습니다.

(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바울도 사탄을 이 세상의 신(고후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2:2)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부응하지 않는 모든 것 안에서 마귀의 영향력을 보셨습니다.

바울은 죄를 개인적인 행위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뿐 아니라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속박하는 준자치적인 권세로 보고 있습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이러한 연고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깨치고 들어오셔서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의 굴레에 묶고 있는 우주적 권세로부터 구해 주셔야 한다고 믿었고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일어났다고 믿는 것이며 이것이 속죄에 관한 승리자 그리스도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순서에 있어 우선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탄의 패배가 있어야 하고 그리하여 인간과 세상이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짐이 이어지며 그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을 얻게 되는데 이 기업에는 속량 곧 죄사함(1:14)이 포함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나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인데 내가 그 과정의 아주 작은 일부를 이루는 온 세계적인 일입니다.

그 구원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죄의 필연적 결과가 될 수밖에 없었던 파멸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없는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세상의 것들로부터 생명을 찾으려 애쓰는 우상숭배적이고 헛된 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증언인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이런 위업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적 속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만이 아니라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의 모든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세들이 파괴적이고 체계적인 세력임을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측면이 전쟁 행위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모든 측면은 십자가 사건과 같은 사랑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 우주적이고 영적인 사단 마귀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왜 승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들, 창녀들, 그리고 다른 죄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종교적 금기를 깼을 때, 또한 안식일에 종교적 전통을 깨고 애정을 기울여 사람들을 치유하고 자유케 하였을 때, 십자가 사건에 비추어 우리는 주님이 사단 마귀의 권세들과 맞서 싸우고 있으며 종교적 율법주의와 억압을 지속시키는 체계적인 악을 폭로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면서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또한 파괴적인 사단 마귀의 권세와 마주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담대하게 인종의 구분이라는 선을 넘어서 사마리아인 및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칭찬하였을 때, 또한 나병 환자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어루만지며 다른 사회적 장벽을 넘어섰을 때 주님은 인종주의나 사회적 주변화를 지속시키는 악한 권세를 폭로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면서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지극히 가부장적인 문화 한 가운데서 여자들을 품위있게 존경심을 갖춰 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사회적 종교적 잔인성과 심판주의를 지속시키는 권세를 폭로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이 싸움의 다른 의미는 마귀 권세의 볼의함을 드러냄으로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한 죄는 심판받아 마땅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무력이나 다른 수단을 심지어는 신적인 능력을 동원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들은 자기희생적 사랑이라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고전2:8에서 만일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들과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에 대한 이런 지속적인 폭로와 저항은 그들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형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들은 자기들에게 협조적인 인간 대리자들과 합력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지만 그리고 그로 인하여 아주 쉽게 승리한 줄 알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알게 된 것은 결국 자신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따라 자기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왔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단 마귀의 권세에 대하여 승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 이루었다 고 말씀하신 것이고, 거기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는 줄로 믿습니다.

 

자기희생적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지혜는 바울이 분명히 시인하듯이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방식이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의 그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사명은 그날 갈보리에서의 궁극적인 승리가 힘에 의한 자기 유익적 방식이 아닌 자기희생적 사랑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로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을 따를 때 세상의 권세들에게 그들이 갈보리에서 패했음을 상기시키고 또한 세상을 폭력적인 권세들의 죽음의 손아귀에서 구원하고 계신 하나님의 어리석어 보이는 은밀한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적인 속죄론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측면은 파괴적이고 압제적인 사탄의 나라에 맞서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신화적이 아니며 자기희생적 사랑으로의 승리이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향한 핵심 요구는 이런 삶을 따르고 이런 사단의 왕국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밝혀 노동의 어두운 현실을 드러냈듯이 그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으면 어찌 `알게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고소하지 않으면 어찌 심판이 시작되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전쟁에 개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에 의해 정의되는 주님의 성품 및 통치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생각과 태도와 행위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룬 승리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 시대에 확장하는 것입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설교자
  • 1
  •  속죄의 본질
  • 2018-10-05
  • 방영철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