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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팔복의 말씀

  • 성경말씀 : 마태복음 5:1-12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1-10-03

 

2021년 10월 3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태복음5:1-12

제목 : 팔복의 말씀

 

75세 노인이 쓴 팔복

내 굼뜬 발걸음과 떨리는 손을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오늘 내 귀가 얼마나 긴장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내 눈이 흐릿하고 무엇을 물어도 대답이 느리다는 걸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오늘 내가 물컵을 엎질렀을 때 그것을 별일 아닌 걸로 여겨 준 자에게 복이 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찾아와 잠시나마 잡담을 나눠 준 자에게 복이 있다.

나더러 그 얘긴 오늘만도 두 번이나 하는 것이라고 핀잔주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다.

내가 사랑받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자에게 복이 있다.

내가 찾아갈 기력이 없을 때 내 집을 방문해 준 의사에게 복이 있다.

사랑으로 내 황혼녘의 인생을 채워 주는 모든 이에게 복이 있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보살펴 주는 내 가족들 모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 그랙 맥도널드 -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여기서 산은 언덕 정도의 모습이고 그래서 이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앉으셨다는 표현은 당시 랍비들이 중요한 말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산상수훈이 무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지에 대한 이견이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무리들이 지키기에는 어렵게 여겨지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6장에 기록된 같은 말씀에서도 6장 앞부분에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 제자들만 들으라는 뜻은 아니고 그 제자들이 듣고 나가서 실천하고 전해야 할 내용으로 여겨집니다.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한 개인이 자기의 마음을 열고 정성을 다 쏟을 때 사용되는 용례입니다.

; ‘가르쳐’도 단순과거형이 아니라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한 번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로 보아 산상수훈은 그 산에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마태가 정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카리오이’는 복이 있도다 하는 외침의 감탄사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며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을 복이며 기쁨의 함성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쉬레’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시편1:1에 나오는 ‘복있는 자는’에 해당합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헬라어에서 가난한 자는 페네스와 프토코스가 있는데 페네스는 여유가 없는 가난이고, 프토코스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입니다.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 가난한 자는 에비온인데 이는 지상의 자원이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 마음에 돈 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욕심낼 힘이 없는 사람의 심령입니다.

그러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이 말씀이 가난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욕심이나 자만이 없는, 자신의 절대적인 무능력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호이 푸튠테스, 이 애통의 단어가 사용된 예는 야곱이 요셉의 죽음을 통고 받았을 때의 심령이었습니다. 이 애통은 자신의 죄와 자신의 무가치성을 절망하리만치 슬퍼함입니다. 김홍기교수는 이로 인해 9일을 울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슬퍼해야 할 것들에 대하여 슬퍼함입니다. 

그런데 이 애통이 오히려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심령이 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위로는 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위로입니다. 그러기에 애통하는 자가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으니 복인 것입니다.

 

팔복

  윤동주 1940년 12월(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27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의 육필 원고에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로 되어 있다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것이오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자조적인 뜻이 아니라 슬픔이 곧 위로가 됨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호이 프라에이스. 온유함이란 일반적으로는 우유부단함을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이 단어는 길들여진 짐승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민수기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였는데 모세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진 사람이었습니다. 잠언16:32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하셨습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호이 페이톤테스 카이 디폰테스 텐 디카이오수넨, 양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의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리고 목마름은 가벼운 것이 아니고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의 굶주림이고 마시지 않으면 당장 죽게 될 사람의 갈증입니다.

여기서 의도 소유격이 의미하는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목적격이 되는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개념입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배부름일 것입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호이 엘레에모네스. 형식적으로 이 말씀은 인과응보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마18:35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보다 더 나아가는 말씀인데 긍휼이라는 헬라어 엘레몬은 히브리아 헤세드와 같은 의미로 이는 나의 자리에서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로 가서 그의 자리에서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사람은 자기 입장을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가장 계시적인 모습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긍휼이 여김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호이 카타로이 테 카르디아, 청결함의 카타로스는 깨끗한 옷, 키질한 곡식, 정예의 군대, 물을 타지 않은 우유와 포도주, 순수한 금속 등에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와 함께 그 동기에 있어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며, 오늘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화평이란 말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인데 샬롬은 나쁜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본문에서는 화평 자체가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쁜 것을 치워줄 뿐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워주는 이가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히브리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에베소서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신 분이라 하셨습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에네켄 디카이오수네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6절의 의가 보편적 의라면 10절의 의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의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직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가족간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로마제국의 상황에서 황제를 그리스도라 해야 로마제국내에서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욕을 듣는 일이었고 박해를 받는 일이었고 모함을 듣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천국을 얻게 되는 복 있는 때라 하셨고, 이미 믿음의 선진들도 겪은 일이라 하셨습니다.

 

팔복의 말씀은 이와같은 일들을 행함으로 복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사람은 이와같이 행한다 하신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사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팔복의 내용이 복이 되는 세상은 현 세상이 아닙니다. 

현 세상에서는 팔복을 행하면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됩니다. 

이를 행함으로 복있는 자가 되는 세상은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변화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서 팔복을 실천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일이며, 동시에 복을 받는 일입니다.

 

그 가운데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팔복을 지금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먼저 믿는 자의 삶이고 그가 복있는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이 있는 자가 되셔서, 잘 믿는 자가 되셔서 팔복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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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복의 말씀
  • 2021-10-05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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