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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주님으로 충만하기

  • 성경말씀 : 마태복음 12:43-45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1-09-26

2021년 9월 26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태복음12:43-45

제목 : 주님으로 충만하기

사람은 무인도에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고독하게 됩니다.

사람은 고독한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어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고독한 자리로 내몰려서 고독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서로를 고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군중속의 고독이란 말을 미국의 사회학자 리스먼이 하였고 고독사까지 생겨났습니다. 

고독사(孤獨死)란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것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항에 의하면 "고독사"란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을 말합니다.

고독사 통계입니다.

2010년 580명 2011년 693명 2012년 741명 2013년 922명 2014년 1379명

2015년 1676명 2016년 1820명 2017년 2008명 2018년 2447명 2019년 2536명

2020년 2880명

고독사가 발생하는 과정은 경제적, 개인적인 문제 외에도 가족 간의 갈등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 밖에 경제적 문제와 성격 차이, 가치관 차이, 종교 문제 등으로 형제, 부모와도 연락을 끊거나 의절하고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치적 이념 차이로 부모자식간에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졌다. 

한국에서도 하나낳기 둘낳기 정책으로 외동자녀가 많아졌고 80년대 이후에 이혼율 급증과 민주화 이후로는 점차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확산되었으며, 1998년 IMF 경제위기로 직장, 금전문제 발생으로 결혼, 연애 포기 및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보편화 또는 가치관 대립 등으로 인간관계 단절이 심화되었고 2000년대 이후 독신자, 이혼, 독거노인, 실직자, 구직포기자 등의 증가로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독거노인의 고독사와 장애인의 고독사는 가끔씩 방송과 언론의 조명을 받지만 일자리를 잃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독신 30~50대 중장년 남성의 고독사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기도 하는데,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30대~40대 사회부적응자들의 고독사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손해 보는 인간관계나 일방적 양보를 거부하는 것이 일반에게서 친구, 가족으로도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자신에게 감정적, 정서적, 물질적 스트레스나 소모를 하게 하는 인간관계를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세상에서 말세의 징조인 무정함이 팽배해 가는 현상입니다.

비슷한 개념으로 무연고 사망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통상적인 장례나 사망신고가 불가능하므로, 무연고 시신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서 처리하고서 무연고 사망자를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가족관계등록관서에 통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사망신고를 내도 연락을 거부하거나 시신 인수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연고 신고로 청소를 하러 왔는데 집안이 도둑 든 것처럼 뒤집어져 있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때는 유족들이 먼저 와서 부모가 죽었는데 집문서랑 재물 찾기만 급급해서 그리하고 간 경우라 합니다.

고독사의 사회적 현상을 길게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 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본문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말씀 앞의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12:38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 몇 사람은 와서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이 표적이란 당신이 메시야라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그 많은 표적과 이사를 보여주셨음에도 그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내가 요나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야 그제야 너희가 믿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유대인들의 심령 상태가 마치 사람에게서 나간 더러운 귀신 하나가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더러운 귀신이 사람으로부터 나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의 율법관이 형식적으로 율법주의로 변하게 됨에 따라 오히려 율법은 그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가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온 상태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랑종 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악한 영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건으로 누적되니 그 영들이 인간을 조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악의 통로가 만들어 지고 그 통로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드나들며 자리를 잡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지닌 율법적 편견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신 이적마저 바알세불의 이름을 들어 모독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의 어떤 모습들을 보면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실이 오히려 일곱 귀신을 끌어드린 경우가 같은 모양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저런 생각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모습들도 있습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과 이간질과 두려움과 더러움입니다. 이들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마12: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이와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과 삶은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며 결국은 한 인간의 영혼과 그 신앙공동체를 파멸케 하는  요인이 됩니다.

막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엡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계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앞에서 말씀드린 고독사는 마귀의 역사에 의한 현대적 증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보면 인간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자는 중성자와 전자 사이에 축구 경기장 중앙의 공과 관중석 만큼의 거리가 진공상태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그 공간을 압축시키면 인간은 소금 알갱이 크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은 비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인간의 마음이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이 비어있는 마음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며 그 안에다 무언가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유명해지려고도 하고, 폐쇄적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카톡이든지 페이스북이든지 그와 같은 사회적 통신망 세계에 빠져있고, 어떡하던지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 합니다.

돈, 권력, 명예 등을 유사전능성이라 합니다. 하나님 대신 그런 것들로 자신을 채우려 하는 것인데 될 것 같지만 되지 않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금물은 먹기 시작하면 갈증이 일기 시작합니다.

 

유사종교성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본문에 의미하는 율법주의라든지, 기복주의, 그리고 경건의 모양, 신비주의, 고행, 이단 등등 으로 마음을 채우려 하지만 오히려 심각한 병이 들게 됩니다.  

 

주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충만한 모습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가 계시는데 일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가 합쳐져서 완전해 지신 것이 아니라 각각 완전하신 삼위가 합쳐져서 일체가 되심입니다. 

막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주님으로 충만함이란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적용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함입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고독한 자리에서 고독사 한 것이 아니라 그곳을 은혜로 충만케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그러하셨고,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그리하였습니다.

인간 소외가 날로 극심해져가고 있고, 인간의 내면이나 관계성에도 거짓과 이간질과 두려움과 더러움이 쌓여만 가고 있는 말세에 그래도 소망이 되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행전5:32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으로 충만케 될 것이고

그 은혜로 거짓과 이간질과 두려움과 더러움으로 채워져가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쓰임받는 삶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으로 충만해지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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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으로 충만하기
  • 2021-09-30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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