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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강도 만난 자의 이웃

  • 성경말씀 : 누가복음 10:29-37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1-03-07

 

2021년 3월 7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10:29-37

제목 : 강도 만난 자

 

제가 처음 버마라는 나라를 알게 된 것은 축구 경기를 통해서 였습니다. 70년대 버마는 우리나라와 아시아에서는 우승을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나라였습니다. 특히 개인기가 뛰어나고 선수들 이름이 비슷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미얀마는 동남아 서쪽 끝 인도 옆에 위치하고 있고, 나라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여섯 배 정도 되고 인구는 약 5천만 명 정도입니다. 일인당 GDP가 1500달러가 안 되는 최빈국입니다. 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보다 잘사는 나라였습니다. 원래 수도는 양곤이었는데 군부가 네피도로 옮겼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불교도이며 기독교와 이슬람 힌두교가 극히 소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2016년 기준 미얀마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3,456명이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얀마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2017년 기준 22,463명입니다.

 

1824년부터 1885년까지 영국이 세 차례 침략해 영국령 인도에 편입이 됩니다. 

1937년 인도에서 분리가 되었고 영국 직할 식민지로 귀속되었고 1942년 태평양 전쟁 중이던 일본군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버마에서 몰아내고 일본은 버마에 괴뢰정부를 세웁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고 일본은 패전하게 된 이후 영국이 버마를 재점령하게 됩니다.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을 하고 국호를 버마 연방(Union of Burma)으로 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아웅산 장군은 1947년에 암살당하였습니다.

1962년 네윈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1974년까지 사직할 때까지 버마를 통치하지만

버마식 사회주의 체제로 인해 버마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며 국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아버지(아웅산 장군)이 살해당한 이후 영국으로 도피하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 경제학을 배웠고 88년 뇌졸중으로 어머니가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귀국하고

미얀마 독재 정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합니다.

1988년 8월 8일 우리나라에서는 88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때에 네 윈 정권에 반대하여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3000명이 넘는 일반 시민과 대학생, 승려들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1989년 6월 군부는 버마(Burma)에서 현재의 미얀마(Myanmar)로 국명을 바꿨습니다.

군부는 권력자이며 기업의 주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얀마 군부를 먹여 살리는 나라는 중국, 인도, 태국 등인데, 이들과 무역을 통해 계속해서 군부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부를 지속적으로 제재하지만 미얀마는 구조적으로 민주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 군부의 힘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군부는 헌법과 정당과 재벌을 쥐고 있으며 대통령은 군통수권이 없습니다.

1990년 총선에서 민주진영이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군부에 의해 선거결과가 무효화 되었습니다.

2015년 아웅산 수지로 대표되는 민주화 진영이 의회를 집권하였고 2020년 총선에서 다시 압승하였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군부가 2021년 쿠데타를 일으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군부는 자국민들을 향해 발포를 하고 있는데 이를 제재할 힘이 없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하고 있고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총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버마의 민주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자들인데 근세사에서는 영국이라는 강도를 만났고 그 이후로는 군부라는 강도를 만났는데 두 번째 강도는 자국민들이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출사표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강도와 강도당한 자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웃과 힘을 다해 돕는 이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강도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강도만난 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웃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강도에게 무어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는 이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누구나 강도만난 자의 삶을 원치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피해갈 수도 없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강도만난 자의 선한 이웃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강도만나는 것이 아니라 강도를 만났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웃이 없을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행인들을 약탈하기 위한 강도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혼자 이 길을 가지 않고 여럿이 함께 갔는데 이 강도 만난 이는 다른 사람들을 기다릴 형편이 못 되었는지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강도를 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위험을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누눈가 그 길을 함께 가주는 자가 있다면 좋았을 일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고, 또 그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린이 성경에서는 이 때 제사장과 레위인이 혹시 자신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는 강도만난 자가 도움을 청할까봐 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 지나갔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이가 죽었을 것으로 여겨 죽은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일이니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자기 암시를 하면서 그 길을 갔을 가능성도 있고, 강도 만난 자를 데리고 이 길을 가다가는 날이 저물어 갈 수 가없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면서 그 길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다른 핑계를 하나 더 생각해 본다면 괜히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강도들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하며 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위험한 상황이 되면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하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나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으로 여김을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이 거하는 땅을 밟게 되면 그 신에서 먼지를 털어버릴 정도로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타자를 향한 측은지심이 겉으로 드러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3:16-17에서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였습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 그는 히틀러의 나치정권 하에서 목사들과 긴급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그는 무고한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항거하다 체포당해 8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니묄러 목사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다!”는 내용입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을 뿐 아니라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가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요?

내가 만일 이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일까요?

 

사마리아인이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까지 하였고, 그 말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아 사마리아인은 이 주막 주인에게 그와 같은 신뢰를 받고 있던 삶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이 사람은 그가 회복된 후에 자신을 이같이 구원해준 이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벽을 허무는 또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강도만난 자를 보게 된다면 그도 가까이 다가가서 불쌍히 여기며 치료하고  돌보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포로된 자였고 눈 먼 자였고 눌린 자였고 강도 만난 자였는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놓임과 자유함과 치유와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주변에도 인생에 강도를 만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처로 인하여 쓰러져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는 이들입니다. 가정 폭력 학교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도 있고, 복지 시설에서 18세가 되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사회로 내몰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산업재해로 경제적 파산으로 쓰러져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큰 시험을 받아 믿음의 줄을 놓아 버린 이들도 있습니다.

멀리는 로힝야족 크루드족 시리아난민들 예멘인들 팔레스틴인 나이지리아인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도와달라는 제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한국말로 외치고 있는 버마인들이 있습니다.

마치 바울이 드로아에 있을 때에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인이 나타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우선은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어야 합니다. 방송도 귀 기울여 듣고 자료도 찾아보고 해야 합니다.

다른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당신들이 죽어갈 때 지켜보고 있었노라는 그래서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노라는 것으로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들을 내가 할 수 있는대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도 널리 전해야겠지만 저들의 고통도 널리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응원의 댓글도 달고, 후원계좌가 열리면 소액이라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이 보낸 편지를 성전에 펴 놓고 기도했던 것처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이 사실을 고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월 1일은 102년 전 일제의 탄압에서 이 나라 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일제의 총 검 앞에서 맨손으로 만세운동을 불렀던 날입니다. 

불과 반 세기 전에 일단의 군인들이 자국민을 향하여 총검을 휘둘렀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민주화와 번영의 축복을 받은 은혜를 갚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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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도 만난 자의 이웃
  • 2021-03-09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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