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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 성경말씀 : 마가복음4:1-9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10-11

20201011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가복음 4:1-9

제목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토착화 신학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는데 기독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여김을 받은 것은 삼일운동 때 부터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서양종교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삼일운동 때 기독교가 앞장서고 많은 희생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리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도 그런 염려는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은 민족적으로 종교를 바꾸는 데 있어서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들이 자신들의 민족종교를 오랜 역사동안 바꾸지 않고 지내오는데 반해 우리 민족은 샤먼종교에서 불교로 불교에서 유교로 유교에서 기독교로 주류세력들이 종교를 바꾼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후의 종교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토론한 것인데 그 때 저의 생각은 설마 우리민족이 기독교를 버리게 될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현재는 놀랍고 안타깝게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아무 여과장치 없이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마지막에 부르는 찬송 첫줄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가 절실히 가슴에 다가옵니다.

우리민족이 복음에 대해 좋은 땅이었는데 이제는 좋은 땅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영상으로 독서모임을 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재난과 교회로코로나 시대 각 믿음의 공동체들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작성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 기독교 고등학교 교목을 하신 분이 쓴 부분이 있는데 기독교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10년 전만 해도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교인이었는데 이제는 한 학급 25명 중에 기독교인이 3-4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독교 교육이나 예배를 인도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부연한 글에는 그런 중에도 그 학급의 담임선생님이라든지 아니면 그 학급의 영향력 있는 학생이 삶으로서 신앙을 나타내는 학급은 그렇지 않고 기독교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소수이지만 그들에 의해 그 학급 즉 그 땅이 좋은 땅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통해 우리나라는 복음에 있어 길가 밭이 되었고 돌쩍 밭이 되었으며 가시덤불 밭이 되었고 그 이상으로 병들어 있는 땅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보았는데 한 분이 밭을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씨앗이 자라기까지는 하였는데 시들시들 해져 이상하다 생각하고 다음 해에는 다른 종자를 심었는데 마찬가지여서 조사를 해 보니 그 밭의 1m 아래에 산업쓰레기가 몇 미터가 묻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감춘 채 밭을 거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미리 예비하고 주신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의 심령이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좋은 땅으로 바뀌어 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들으라로 시작해 들으라로 끝이 납니다.

43절의 시작의 들으라는 아쿠에테 인데 너희는 들으라 이고 49절의 들으라는 아쿠에토 인데 그는 들으라 입니다.

아쿠오라는 헬라어 동사는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셨을 때에도 사용된 것으로 듣고 순종하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0 : 17). 계시록 13절에도 이르시기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이 단순히 와서 앉아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계시록 3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단순히 듣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려 올 때에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말씀이 들려 올 때에 마음의 문을 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410절에 제자들이 그 비유들을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행 귀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제자들이 물은 것으로 되어있고 누가복음 8장에서는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제자들의 질문은 위의 두 가지를 모두 물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비유로 말씀하신 뜻은 무엇이며, 비유의 말씀의 뜻은 무엇 입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11-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는 그 외인들처럼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사야 69-10절 말씀을 주님께서 인용하신 것인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하신 말씀입니다. 이 마음이 요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하기는 하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이 돌아와서 고침을 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러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번득여서 하나님의 진리가 명백해지기를 원했으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 속에서 둔하고 이해력이 없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견으로 눈이 어두워졌고 절망적 생각 때문에 귀가 멀었으며 너무 게을러서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서운 분노의 음조가 아니라 애석한 사랑의 음조인 것입니다. 좌절된 사랑에 대한 열망이며, 통절이고 슬픔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말씀하시는 그리고 명령하시고 부탁하시는 말씀이 바로 들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생각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아멘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길가 - 사단이 와서 즉시 말씀을 가져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말씀을 듣기는 듣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이 말씀이 들리는 자리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졸거나 잠자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고,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이 길가는 새들 즉 사단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옛분들이 하시는 말씀에 밭에다 콩을 심고 있으면 저 멀리 나무에서 까치 꿩 등 새들이 보고 있다가 사람이 가고 나면 와서 파먹는 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 알을 같은 자리에 심는다 하셨습니다. 하나는 새들의 먹이로 하나는 벌레들의 먹이로 그리고 하나는 사람이 먹게 되게 그리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말씀은 들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것이 길가 밭입니다.

길가 밭을 면하는 길은 사단이 오기 전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돌밭 햇볕이 작력할 때 새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 버리는 밭입니다.

햇볕을 문제라 할 수는 없습니다.

힘든 일이나 환란이나 핍박을 피하기만 하면서 살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내하며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다른 수양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한편으론 밭에서 돌을 제거해서 씨앗들이 뿌리를 잘 내리게 해야 합니다.

돌들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악의, 탐욕, 음란, 시기질투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제거해 주어야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고 그럼으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를 때에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말씀이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가시 떨기 밭 -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 있는 나쁜 습관이나 삶의 태도가 가시 떨기입니다. 위선, 교만, 이기심, 근심걱정 등입니다.

씨앗이 싹이 나거나 자라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가시 떨기의 극성으로 열매는 맺지 못하게 되는 밭입니다.

믿음이 싹이 날 때나 어릴 때는 문제가 안 되다가도 조금 일을 하려고 하면 가로막는 것이 가시 떨기입니다. 더 커지려고 하면 가시로 쿡쿡 찌르며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인해서 손해가 될 것 같아 믿음이 자라는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가시 떨기는 뽑아 버려야 하는데 워낙 뿌리가 깊어 뽑기가 어렵고 뽑다가는 곡식을 다치게 합니다. 그래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가시떨기 속에서 자란 곡식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가시덤불과 함께 아궁이에 던져질 뿐입니다.

좋은 땅 -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이란?

지구의 구조
지각(지표면~ 모호면까지)

* 지구의 겉 부분으로 가장 얇은 층

* 대륙 지각은 화강암질 암석, 해양 지각은 현무암질 암석으로 구성

맨틀(모호면 ~ 깊이 약 2,900 km까지)

* 감람암질 암석으로 구성

* 지구 전체 부피의 80 % 이상을 차지

외핵 (깊이 약 2,900 ~ 5,100 km까지)

* , 니켈 등 무거운 물질로 구성

* S파가 통과하지 못하므로 액체 상태로 추정됨

내핵 (깊이 약 5,100 km ~ 6,400km, 지구 중심까지)

* , 니켈 등 무거운 물질로 구성

* 온도, 압력, 밀도가 가장 큰 층

* P파의 속도가 갑자기 증가하므로 고체 상태로 추정됨

 

우리에게 있어 좋은 땅이란 표토층을 말합니다.

표토층의 두께는 지면에서 속으로 30cm 정도의 땅입니다. 표토층이 1cm 만들어지려면 약 100년이 걸립니다. 그러니 약 30cm의 표토층이 만들어지려면 3000년이 걸려서 만들어 진 땅입니다. 좋은 땅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 땅을 지키고 가꾸어 내는 것이 좋은 땅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첫째 메마른 땅이 아니라 수분이 있는 땅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서 오는 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눈물, 이웃을 위한 희생의 피가 좋은 땅을 만듭니다.

둘째 필요 없는 것들이 제거된 땅입니다. 딴 생각, 오만, 편견, 탐욕, 음란, 악의, 교만 등 보이지 않는 것들, 나쁜 습관 잘못된 삶의 방식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셋째 썩어진 거름이 많은 땅입니다. 넘치는 수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바로 그 부분 그것들은 당장은 필요 없어 보이지만 그저 남아서 버려지는 것 같고 썩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바로 그것들이 모여져서 땅에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에 올해에 그 결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두고두고 그 거름들로 인하여 식물들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본당 청소를 세 분이 하였습니다. 아침에 어느 집사님이 하고 가셨는데 점심쯤에 또 다른 집사님이 하고 가시면서 저에게 문자를 남기셨고 오후쯤에 다른 분이 또 하셨습니다. 저는 본당이 더 깨끗해 진 것이 아니라 거룩해 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베어 나오고 겉에 베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는 고전의 기록이 있습니다.

 

좋은 땅은 만들어지기는 어렵지만 다른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파괴되기는 쉽습니다.

이번 여름의 수해를 보더라도 한 순간에 좋은 땅이 다 파여 내려가고 자갈로 덮이고 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또한 좋았던 땅도 돌보지 아니하면 점점 굳어진 땅이 되며 황폐해져 가는 땅이 되고야 맙니다. 좋은 땅은 보호해 주어야 하며 계속적인 수고와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땅을 위하여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으니 기도를 통하여 합당치 않은 것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사이십니다. 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의사 되시는 주님께 나를 맡기고 주님의 손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아쿠에토 즉 듣고 순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이 만들어주신 좋은 땅에서 그런 추수를 하기만 했지 좋은 땅을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물려 줄 생각은 못하고 있던 차에 코로나19까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인 씨앗이 있고 교회라는 땅이 있으니 좋은 땅으로 회복시키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좋은 땅에서 수확도 할뿐더러 또한 좋은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길가 밭이기만 하지 않고 돌쩍 밭이지만도 않고 가시덤불 밭이지만도 않습니다 물론 옥토이지만도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안 좋은 밭은 줄여가고 옥토는 늘려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공간적으로도 그러하고 시간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어느 때 우리의 심령은 길가 밭입니다. 어느 때는 옥토입니다. 가시덤불 밭의 시간을 줄이고 옥토의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길가 밭에서 돌쩍 밭에서 가시덤불 밭에서 옥토로의 발전 방향이 있고 그런 길을 가게 됩니다. 각각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까지 수고스럽기는 하나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신나는 일입니다. 심기만 하면 306010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옥토가 되면 작은 일도 큰 감사가 되며 큰 기쁨이 됩니다. 오병이어의 역사가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광동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이 좋은 땅이 되어 종말의 때에 열방을 영육간에 먹여 살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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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 2020-10-16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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