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주일오전 2부 예배

 

이웃 사랑

  • 조회 : 9
  • 성경말씀 : 시편133-1-3
  • 설교자 : 방영철목사
  • 설교일 : 2024-02-11

 

2024211일 주일낮 예배

성경 : 시편133:1-3

제목 : 이웃 사랑

 

좀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인간인데 영화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나온 것들이 나중에 현실이 되는 현상을 통해 보면 언젠가 실재로 등장하게 될 것 같습니다. 딤후3:3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하시며 그 때에 사람들이 무정하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 사람의 몸은 가지고 있으면서 무정한 존재가 좀비입니다.

사람인데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흉측하고 몰인정해서 다른 어떤 존재보다 두려운 상태입니다.

좀비들을 보면 악당이나 사기꾼들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입니다.

인간답다는 말은 참 따듯하고 그립고 고마움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과 생기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은 사람다워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께서 생전에 몇 번 하신 말씀이 있는데, 육이오 피난길 길가에서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셨다 합니다. 서너살 되었을까 하였고 단발머리에 위에는 흰색 아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여직도 기억이 선하다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손을 놓쳐서 저리되었을 터인데 당장 가서 끌고 가고 싶으셨지만 본인에게도 이고 진 물건이 있어 어찌하질 못하던 차에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행열에 밀려가고 마셨다 합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 아주 짧은 시간의 일방적인 만남이었는데 그 때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셨던 것이 평생 후회로 남으셨다 합니다.

평생 사시는 동안 그보다 더한 일도 많으셨을 것인데 무엇을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왜 그 일을 그렇게 잊지 못하셨는지 생각하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율법 중에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주저함 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이시며 그렇게 사시고 그렇게 죽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의 등에 지워 모리아산까지 삼일 길을 갔습니다.

훗날 모리아산 꼭대기 분지에 세워진 도성이 예루살렘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올려놓았던 바위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습니다.

개역성경과 공동번역에는 우리가 빠져있습니다.

22: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하고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을 번역하신 분들이 웨나슈바우리가 있음을 몰라서 그리 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계시적 언어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끝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 번제단 나무 위에서 살아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하시기에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18세기 후반 천주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십계명을 보고는 조정의 대신들이 인간의 삶에 충효가 근간인데 부모 공경을 다섯 번째로 하는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성리학의 눈으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에서는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하는 질문에 너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네 이웃이다고 일러 주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하셨습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며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인간은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다고 생각하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는 첫 구절이 절절이 다가옵니다.

아힘즉 형제들이 야하드즉 함께 쉐베트즉 거주하는 것이 어찌 그리 토브즉 선하고 나임즉 아름다운고 했는데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즐겁다가 더 원어에 가까운 번역으로 보입니다.

형제가 목숨을 다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막대한 재산을 양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함께 사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즐거운고) 하고 있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에 대한 과한 표현이라 생각되어 이상히 보이는 글이지만,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점도 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왕을 대신할 왕을 세우기 위하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왔을 때에 이새는 형들만 불렀지 다윗은 부르지도 않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려 하였을 때에 큰형 엘리압은 다윗에게 노를 발하며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하였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삼상18:7)’이라는 말에 장인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더 끔찍 했습니다.

다윗의 딸 다말과 큰 아들 암논이 그러하였고,

이 일로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였고,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반역하였으며,

다윗이 반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압살롬은 살해 되었습니다.

넷째 아들 아도니아도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였다가 그의 동생 솔로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다윗의 이 고단한 인생 중 언제 이 시를 기록 하였을까요?

그의 삶에서는 단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만으로도 그것이 그토록 선하고 아름다운 일로 보였기에 이와같이 고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윗의 눈에만 아니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을 때 주일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었는데 저희 반 아이들이 둘러서 뭔가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가 보았더니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한 아이가 눈깔사탕을 입으로 깨고 있었습니다. 나누어 먹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게 잘 안되니까, 입에 넣어 깨려고 하는 아이는 아이대로 그것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애가 타서 발을 구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내 입에 들어간 사탕을 깨서 나누어 먹겠다는 생각도 불가하고 남의 입에 있는 사탕을 받아 먹겠다는 생각도 불가하지만 그런 때도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잠시만 기다려라하고 가게에 가서 사탕을 몇 주먹 사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가 평생에 잘한 일로 기억되는 일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평범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공동체를 유지함에 중용과 공평이 있어야 하고 더하여 가장 중요한 미덕은 사랑(필리아)이라하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이들에게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셨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한다는 것은

첫째 하나됨의 인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인데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다라는 것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둘째 목적이 같음이요.

머리 되신 주님의 뜻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목적이 동상이몽이 되지 않도록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이 목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동행함입니다.

주님의 가시는 길을 함께 따라야 하겠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마치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그 기름이 아론의 수염으로 흘러서 옷깃까지 내림같다 하였습니다.

기름 부음은 존귀와 치유와 향기를 나타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 그 자체가 존귀함이요 치유요 향기라는 말씀입니다.

심리학에서 집단치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선한 집단에 문제가 있는 한 사람이 들어오면 저절로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함께 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그 모습이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다 하였습니다.

헐몬의 이슬이란 지중해의 습기를 머금은 대기가 만년설이 있는 헐몬산을 지나면서 이슬이 되어 이스라엘 산들에 내려 그 땅의 식물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에 하나님의 은총이 그와 같이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이르시기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셨는데 그것은 영생 즉 구원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설교자
  • 조회
  • 1
  •  사순절
  • 2024-02-18
  • 방영철목사
  • 11
  • 1
  •  이웃 사랑
  • 2024-02-11
  • 방영철목사
  • 10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