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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삼일절

  • 조회 : 12
  • 성경말씀 : 사사기7:19-23
  • 설교자 : 방영철목사
  • 설교일 : 2024-02-25

 

1905년은 을사년이었고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박탈된 해였습니다. 이 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었고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1906년부터 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에 이토가 부임했다. 원래 통감부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 전적으로 감리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정부의 전반을 감독하면서 일제의 한국강점을 위한 정지작업을 수행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으로 행정권을 박탈했으며,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외교권에 국방권 행정권까지 상실되었다.

1909년 일제는 사법권을 장악했고 19105월에는 경찰권마저 접수해 갔다.

19091026일 안중근은 서른 한 살에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자격으로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오를 처단하였다.

이토를 저격한 이가 조선의 안중근이라는 보도는 당시 조선의 기득권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황제 순종과 관료들은 서울 장충단에 이토의 위패를 모셔놓고 추도회를 가졌는데 서울의 모든 학교가 학생들을 인솔해 절했고 집집마다 삼베를 감은 반기를 걸었다 한다.

전국의 지방 유지들도 사죄 사절단을 조직하여 일본으로 앞 다투어 달려갔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주교 뮈텔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한국 천주교내에서 1993년에 가서야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재평가 되었다.

19108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찌(寺內正毅)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고, 그 일주일 후인 829일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1392년에 개창된 조선은

18971012일부터 1910829일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 영어: Empire of Korea)

되었다가 519년 만에 망하였습니다.

경술년 국치후 9년 만인 191931, 우리 선조들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자주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우리(吾等)는 이에 우리 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이 선언으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똑똑히 밝히고,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토록 갖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선언과 함께 전국에서 민족독립의 장엄한 드라마가 전개되었다. ‘3·1운동혹은 ‘3·1혁명이다.

이날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태화관과 파고다공원, 평양·신의주 등 지방의 7곳에서 일어났다. 봉화를 든 지 사흘째 되는 33일은 고종의 장례날, 의리로 본다면 이날은 잠잠할 줄 알았는데 예산·개성 등 7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1일은 하루에 67곳에서 일어났고, 50곳이 넘는 날도 3, 30곳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되었다. 50명 이상이 참가한 곳만 집계한 일제 측 통계는 3~51542회에 202만명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2000여회나 되는 집회에 1년간 1천만명이 넘었다는 증언도 있다. 사망자 7509, 부상자 45562, 피검자 49811, 가옥 소실 724, 교회당 소실 59, 학교 소실 2. 이는 당시 일제측의 통계이다.

강점 후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종교집회만 제한적으로 허락된 상황에서 정교분리정책은 역설적으로 종교인이 3·1운동의 주역이 되도록 만들었다. 3·1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는 돋보였다.

1919년의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이 나타났다.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주권재민 사상은 확립되었고, 민주공화정 이념은 실현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3·1운동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은 크다.

첫째,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그때까지 다소 부진했던 독립운동을 통합, 활성화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본격화시켰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그 첫 열매다.

 

둘째, ‘독립을 선언한 조선 민중은 후속 조치로 나라를 새로 세우려고 했다. 그것이 백성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이다.

재판을 받던 민족대표들은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셋째, 3·1독립선언에 따라 13도 대표 29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모여 1919411대한민국을 국호로, 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나랏일을 맡겼다.

 

3·1운동은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0여일밖에 되지 않은 때에, 조선인은 3·1운동을 통해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민족자결주의’(1914-1918년의 1차 대전 끝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14개 평화원칙)의 라는 복음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려 했다. 선언서는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고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일본을 포함한 전승국 식민지에는 적용될 수 없었고, 더구나 비유럽·비백인계·비기독교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3·1운동은 그런 불가능을 기회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전승국 일본에 항거해 전승국 중심의 베르사유 체제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런 강력한 도전이 중국을 비롯한 약소국가의 반제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인류의 평등과 민족의 자존 못지않게 세계의 평화를 강조했다.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에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함분축원(含憤蓄怨)2천만 조선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는 것은 동양 평화를 영구히 보장하는 길이 될 수 없다. 동양 안위의 주축인 중국이 일본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짙게 갖는 것도 동양 평화를 어지럽히는 멸망의 길이라고 경고한다.

조선이 정당한 생존권을 얻어 독립하는 것이야말로 일본과 중국으로 하여금 동양 평화의 담지자 역할을 감당케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때문에 조선의 독립은 동양 평화의 핵심이 되며,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로 삼고 있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주독립을 위한 조선의 3·1운동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조선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운동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운동임을 확실히 했다.

 

독립선언문과 삼일운동에는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희년의 선포에 해당하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61:1 이하)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기드온이라는 사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아직도 숫자가 많다 하시며 삼백 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하셨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기드온이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셨고 기드온과 백성들이 그리하였습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하셨습니다.

 

삼일운동과 300 기드온 용사 사건에서,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6:6)

당시의 한국 기독교는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였고 더불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다해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7:3)

그 일만명 중에서도 삼백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비해 미디안 군사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강했습니다.

당시에 만세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 자리를 믿음으로 떠나지 않고 감당한 분들입니다.

 

셋째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7:18)

그 상황에서 삼백 용사들이 횃불과 나팔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습니다.

일제의 총 칼 앞에 아무 무기도 없이 단순히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일도 마찬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른 수단을 쓰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그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이십니다. 그 사랑과 공의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데 있어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며, 공의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룸에는 마음의 고통이 따르고 공의를 이룸에는 육신의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랑보다 공의를 이루는 일이 더 어렵고 두렵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삼일운동도 그 당시에는 실패한 듯 보였지만 그 일을 통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끝내 독립의 역사가 이어지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삼일운동은 한국기독교가 외래종교에서 애국종교로 여김을 받게 되는 계기였으며 그 이후 한국 기독교의 찬란한 유산이었습니다.

 

삼일운동 10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을 기억하고,

한국 기독교가 이 시대에 민주주의와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데 중심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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