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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 조회 : 15
  • 성경말씀 : 마태복음18:12-14
  • 설교자 : 방영철목사
  • 설교일 : 2023-11-05

 

 

2023115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태복음18:12-14

제목 : 잃어 버린 양을 찾지 않겠느냐

 

어느 분이 은퇴를 하고선 내가 직장에 있을 때에는 시간에 매여 못했는데 이제 매일 전도를 해야 겠다생각하고는 매일 전도를 시작했다 합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밀린 숙제를 하듯이 했는데 차츰 다른 마음도 들고 처음의 열정이 서서이 약해져가고 있었답니다.

그날은 비까지 와서 전도지를 들고 나갈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그래도 가긴 가야지 하며 우산을 쓰고 이전에 갔던 집들을 방문 했습니다.

어느 집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기에 전도지만 집 앞에 두고 나왔는데 그래도 뭔가 아쉬운 마음이 있어 다시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며 아주 슬프고 정신 없는 표정으로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전도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터트리며 흐느꼈고 감사하다 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천장에 끈을 매달고 의자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그 때 첫 번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그 종소리가 자신의 결정에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종소리로 인하여 의자 위에서 망설임이 계속되었지만 다시 본래의 뜻대로 하려 하는 순간 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그는 끈을 벗기고 의자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습니다.

그 때 자기 눈에 들어온 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어둠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빛이었습니다.

전도서11:7의 말씀대로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이가 천사인가 했다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 잃은 양의 비유는 마태복음18장과 누가복음1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누가복음의 잃은 양 비유와 비교할 때, 비유의 상황과 청중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 비유의 청중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인데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유의 청중입니다. ‘너희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의 잃은 양은 잃어 버린 소자이고 누가복음의 잃은 양은 회개하여 돌아온 죄인입니다.

; 이는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 간혹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낮에 이동 중에는 양들의 숫자 파악이 안 되다가 저녁이 되어 임시 우리에 넣을 때 헤아려 보니 한 마리가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 세상적 판단으로 하면 한 마리 양은 포기하고 아흔아홉을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최대 난제입니다. 마태복음은 이곳이 이었다 하고, 누가복음은 이었다 합니다.

이 상황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상황일 때 자신이라면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팔레스틴의 목자들이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않느냐 물으시고 있습니다. 그 목자들도 아흔아홉에 대한 염려는 있지만 한 마리 길 잃은 양은 지금 찾지 않으면 필시 해를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 양을 치는 목자들도 그리하는데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더욱 그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 기쁨은 이익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작은 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작은 자 하나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아흔아홉도 중요하지만 작은 자 하나도 그 만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15:1-2).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질문합니다(18:1). 그러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하십니다(4). 이어서 예수님은 누가 큰 자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믿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믿음을 저버리게 만드는 것)으로 화제를 바꾸십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6). 또 소자를 실족케 하는 범죄의 심각성을 경고하기 위해 손이나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8, 9). 그러면서 삼가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10).

14절에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19절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슨 일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잃은 양을 찾는 일에 합심하여 구하면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잃은 양은 소자의 개념도 있지만 또한 잃은 양은 무엇을 잘못한 결과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를 찾는 것이 용이한 것이 아니고 그의 잘못을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함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셨는데, 왜 내가 그리해야하느냐?는 항변에 대해 네가 일만 달란트를 내게 빚진 자였는데 네가 그 모든 것을 탕감 받았지 않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네가 그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못할 일도 아니며 자랑할 일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나 거기 서 있다' 입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

피에 젖은 그대 곁에

지금 나 여기 서 있다

지금 나 거기 서 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내가 아흔아홉이 아니라 한 마리 잃은 양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절절이 감사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쩌다 길을 잃었고 어둠이 덮여오고 사방이 막막한데 그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목자가 찾아와 주었다면 양으로서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서두에 말씀드린 예화는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인데 실제로 그런 극한 상황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이, 누군가의 찾아와 줌이 꼭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찾아와 주신 절기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한 마리 길 잃은 양의 심정이라면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고 그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제자의 입장이라면 곧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될 터인데 어떤 의미로든 잃은 양에 해당하는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귀하고도 귀한 추수가 될 것이며 성탄의 예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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