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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2부 예배

 

분별하라

  • 조회 : 30
  • 성경말씀 : 로마서12:1-2
  • 설교자 : 방영철목사
  • 설교일 : 2023-09-17

 

 

2023917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로마서12:1-2

제목 : 분별하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아불렀습니다.

형제들아는 자신은 사도로서 높은, 먼저 된, 특별한 자의 의미가 아니라 같은, 함께의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이렇게 살아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권면이 당위성이나 강제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인함이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몰라서 그리하였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전에 모르고 지은 죄는 작은 것이지만 알고 지은 죄는 더 큰 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여전히 연약함 가운데 있고, 갑자기 우리가 변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기에 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누군가를 권면할 일이 있다면 이 말씀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 몸을이라 하셨습니다.

몸이라 함은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며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영(프뉴마), (프시케), (사르크스)를 합하여 몸(소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개역에서는 산 제사라 하였는데 산 제물, 산 제사와 같은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에는 다섯 가지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번제와 소제는 상시 제사이고,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는 필요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올라) :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복종을 나타내며 주로 동물이 제물이 되었고,

모두 태워져서 향기로 하나님께 열납 되도록 하였습니다.

소제(민하) :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봉사를 나타내며 주로 곡식 가루가 제물이 되었고 제물 중의 일부만 불태워졌고 나머지는 음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화목제(제바흐 셀라밈) :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화평을 나타내며, 화목제의 특징은 일상 제사가 아니라 특별한 감사의 이유가 있는 제사이며, 그 제물 중의 일부만 번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제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나누어 먹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그 날에 가능하면 다 먹고, 남으면 다음날까지 먹어야 하는데, 적어도 셋째날까지 남은 것은 다 불태워야 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속죄제(핫타트) :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을 나타내며, 일반적인 모든 죄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속건제(아샴) :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족을 나타냅니다. 속죄제와 다른 것은 속건제는 제사뿐만 아니라 변상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물에 관해서나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하여 원금과 거기에 1/5에 해당하는 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하는 것이 속건제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화제, 거제(테루마), 요제(테누파), 전제(나사크)가 있습니다.

화제는 불태워서 드리는 것이고, 거제는 제물을 높이 드는 것이며, 요제는 제물을 흔드는 것이고, 전제는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율법을 준행하는 삶에 있어 감사를 나타내는 방법이었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제사를 통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구신지를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제물은 제사자가 가지고 왔으며, 제사자가 제물 즉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전가하였으며, 제사장이 도살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렸습니다. 제물은 죽어야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산 제물이라 하셨는데 이는 더 이상 나를 대신해 동물이 제물이 될 수 없고 나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크리소스 톰(349-407)제물은 죽어야 제물이 될 수 있다. 눈은 악한 것을 보는 것에 대하여 죽어라, 혀는 수치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죽어라, 손은 불법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죽어라 하며, 또한 산 제물이 되어 손을 펴서 구제하고, 입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권하였습니다. 그러한 삶이 산 제물이라 하였습니다.

 

산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영적 예배 즉 합당한 예배라 하였는데,

이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을 통해 드릴 수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산 제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짐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하니 그러한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나의 주권을 성령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마음은 생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생각은 주로 내가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한 이해를 저장하는 것이고, 이 생각들이 모여서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것을 보고, 주님의 것을 들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되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대를 좋아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삶의 양식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맘몬주의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의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숭배입니다.

이기주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저절로 되지 아니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끌려가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선은 선악을 분별하는 삶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여럿 있지만 가장 많이 적용하는 실제적인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입니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뜻을 여러 번 표한바가 있습니다. 신문에 난 일들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 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하여 선한 것 중에 더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24에서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였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중에 골로새 교회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이나 시기 등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10:38-42의 말씀에서 마르다의 일도 선한 일이지만 마리아의 모습을 더 기뻐하심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차선도 선한 일이고 최선도 선한 일인데 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 아니라 차선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더 기뻐하시는 일 중에 온전하게 여기시는 일을 분별하는 일입니다.

여호와의 법궤가 사무엘 때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래 사울왕 때에도 방치되어 있었다가 다윗이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려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은 법궤를 모셔오려 함에 있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새 수레를 준비하여 하였지만 웃사의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 다윗이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시 모셔올 때에는 역대상15:2에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모셔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에 있어 온전하게 여기시는 말씀을 따라 감당함으로 그 일을 끝내 이루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2장부터는 소위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윤리에 대한 말씀들은 행함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윤리적 삶을 순종함을 통하여 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요한복음2장의 연회장은 알지 못하였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아는 신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1-11장에 이르는 교리적 교훈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이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패함으로 더욱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자는 자신이 된 줄로 여기게 되며 여전히 알지 못하는 자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도 여기에 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는 자 되게 하심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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