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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광복의 은혜

  • 성경말씀 : 시편 126:1-6
  • 설교자 : 방영철 담임목사
  • 설교일 : 2022-08-14

 

 2022년 8월 14일 주일낮 예배

성경 : 시편126:1-6

제목 : 광복의 은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올해는 광복 77주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름이 크게 알려진 분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무명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안중근, 윤봉길, 김 구가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루어짐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루어지는 일들은 복음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세 분의 삶도 한 나라의 애국자로서의 삶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이룬 분으로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마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1897-1910.8.29.)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며,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多默))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9시30분에 권총으로 처형하여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혔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32살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그는 이토의 죄목을 15가지로 열거하였습니다.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이토를 처형한 안중근은 그 일로 인해 추앙도 받았지만 비난도 많았고, 그의 가족은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그가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 고해성사를 청했지만 당시의 조선 교구장 뮈텔은 살인자라 하며 불허하였습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니콜라이 빌렘 신부가 명령을 어기고 먼 길을 와서 안중근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베풀어 주어 그 미사에 참여하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안준생은 안중근의 차남입니다.  

일본 제국의 지시에 따라 안중근 의거 30주년인 1939년 박문사(이토를 추모하는 사당)를 방문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유족에게 사죄를 하여 조선인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4세 때 부친을 잃고 불령선인으로 찍혀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고, 형 안문생(安文生)은 7살 때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어머니는 안준생을 이끌고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중국 상하이에 정착했으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 때문에 급히 상해를 떠났으며 안준생 일가는 남겨집니다.  

일제는 그를 유혹 강제하여 경기도 경성부 서사헌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현 신라호텔자리)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후로는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 하였고 이는 일제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으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도 대서특필되었습니다.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1946년 간신히 귀국하여 남한에서 숨어 살다 6.25 전쟁 와중인 1951년에 안경근과 안춘생, 그리고 몇몇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는데 이 나라  이 민족은 그의 가족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경우뿐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그와같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권한과 부를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김구주석은 안중근 보다 세 살 위인데 김구주석이 청년 때 동학접주로 활동하였고 안중근의 부친과 안중근은 동학군을 탄압하는 역할을 하였던 일과 안중근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김구주석은 한학에 열중하던 터라 당시에 도움은 받았지만 우호적인 시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범일지에서도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그 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중근의 부인 김마리아여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상해에 왔을 때 김구주석께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25일자에는 '안씨 결고(安氏 訣告)'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거월십오일(2월 15일)에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씨가 여순감옥내에서 안중근씨를 면회 고별할 시에 안중근씨가 한국동포에게 결고(訣告)하는 사의(辭意)를 안병찬씨에게 설급(說及)하였는데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매헌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 광현당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한 교육을 거부하고 한학과 신문학 등을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것을 바탕으로 농촌계몽활동을 하였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워 실행하였습니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1932년 12월 19일, 24살의 나이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이 의거로 인하여 명맥을 이어가기 힘들었던 임시정부에 중국의 지원을 비롯 국내와 외국에서도 후원이 이어지게 되어 임시정부가 힘을 얻어 광복의 때까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장제스는 우리 중국군대 100만이 하지 못한 일을 대한의 청년이 해냈다 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적극 후원했다고 합니다.

홍커우공원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윤봉길은 김구에게 시계를 바꾸자 하였답니다. 내 시계는 새것이지만 한 시간 이후에는 쓸데가 없을 것이고 선생님의 시계는 낡은 것이니 그리하자 하였고 실제로 그리했으며 두 시계가 다 남아 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441호인 이 시계는 서울 백범기념관에 보관되어 있고 윤 의사가 백범에게서 받았던 시계는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윤 의사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 전시돼 있습니다. 이 시계들은 2006년 백범 탄신 130주년 기념 특별전 때 한 번 만났던 적이 있고 이후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합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습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광복 후에 김구주석께서 윤봉길의사의 어머니를 찾아가 뵈온 일이 있는데 그 때 김구주석을 외면하셨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1876-1949.6.26)의 백범은 그가 스스로 지은 호인데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습니다. 

그가 남긴 어록을 보면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여러 종교를 거쳐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그는 민족주의자로 통일운동가였습니다.

소련식 민주주의가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남북의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원할 뿐이다.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가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백범일지를 남겼습니다. 우리들이 꼭 읽어야 할 기록입니다.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 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를 전하는 한편, 하권은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권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썼으며, 하권은 1942년에 충칭 시에서 쓰였고 상, 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15일에 출판되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며 부른 찬양입니다.

첫째는 감사와 기쁨을 표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둘째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셋째는 앞으로 그들의 삶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삶이 될 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광복 7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며 이 말세지말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는 이 나라 이 민족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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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의 은혜
  • 2022-08-14
  • 방영철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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