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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주의 은혜의 해

  • 성경말씀 : 누가복음 4:16-19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9-02-17

성경 : 누가복음 4:16-19

제목 : 주의 은혜의 해

1392년에 세워진 조선왕조는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명나라가 1644324년 만에 망하고

이어진 청나라가 268년 만인 1912년에 망하는 과정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나라를 이어오다가 1876(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 1904-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9042,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입니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습니다. 나아가 한국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7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90511,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습니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헤이그특사파견 사실을 안 일제는 720,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습니다. 이어 7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 한국의 내정권마저 장악하였습니다. 이어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81일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단행하였습니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 군인은 군대 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된 의병 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으나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항전은 19099,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밀려 그 기세가 누그러졌습니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안중근(安重根)190910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였습니다.

1910816,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고,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일제에게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4년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한국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이에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만주·노령·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191928일 오전 10, 일본에 거류하고 있었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들이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습니다.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은 한국의 청년학도들이 일본의 수도인 동경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의 뿐만 아니라, 국내 3·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崩御)하였습니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당시 68세로 건강한 편이었는데, 갑작스런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가 있자, 국민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기회만을 찾고 있던 일부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 때가 한국 민족의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였습니다.

천도교·기독교·학생층의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 계획이 통합, 단일화 되고, 불교측도 가담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인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천도교 측에서 손병희를 비롯한 15인 기독교 측에서 이승훈 등의 16명 불교 측에서 한용운 백용성 2인이 가담하여 민족대표는 모두 33인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인쇄가 완료된 독립선언서는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되었습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33일로 결정되자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하여 33일로 내정하였는데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므로 주일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으로, 결국 3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3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29(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이 무렵 탑골공원[이칭별칭: 탑동공원(塔洞公圓)]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였던 것이며, 탑골공원의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3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곳은 비단 서울만은 아니다.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이북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3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 각지로 번져갔습니다. 서울·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의 시위에 이어 2일에 경기도의 개성, 3일에 충청남도의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 밖에 전라북도는 4일 옥구 시위로, 경상북도는 8일 대구 시위로, 전라남도는 10일 광주 시위로, 강원도는 10일 철원 시위로, 함경북도는 10일 성진 및 임명 시위로, 경상남도는 11일 부산진 시위로 각각 도내 각지로 번져갔다. 319일 괴산 시위로 충청북도에 점화됨으로써 전국 13도가 골고루 3·1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321일에는 제주와 조천리(朝天里) 시위로 바다를 격한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운동회수는 2,000회 이상, 참가 인원은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사망자 7509, 부상자 45562, 피검자 49811, 가옥 소실 724, 교회당 소실 59, 학교 소실 2. 만세운동 피해가 모두 일제 측의 통계로 잡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인구가 16백만 정도였고 기독교인은 20만 정도 였다고 합니다. 1.5% 였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중에 16인이 그리고 전체 삼일운동의 역할중에 약 30%를 기독교가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3·1운동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은 그때까지 다소 부진했던 독립운동을 통합, 활성화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본격화시켰습니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그 첫 열매입니다. ‘독립을 선언한 조선 민중은 후속 조치로 나라를 새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백성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재판을 받던 민족대표들은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3·1독립선언에 따라 13도 대표 29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모여 1919411대한민국을 국호로, 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인류의 평등과 민족의 자존 못지않게 세계의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에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때문에 조선의 독립은 동양 평화의 핵심이 되며,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로 삼고 있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주독립을 위한 조선의 3·1운동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조선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운동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운동임을 확실히 했다는 점에서 그 의가 크다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17:26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광개토대왕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다는 점입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의 인격이 어떠한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라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영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의미하는 것에 현실적인 책임성을 다해야 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민족이나 국가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자기 분깃에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의 것을 탐내거나 침해하지 말고 나아가서 내 것을 나누어 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삼일운동은 대한민국의 뿌리이며 정체성이고 한국교회의 유산입니다.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함에 있어 중심내용을 삼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이사야 61: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출사표에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특히 한국교회가 삼일운동의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계승 발전시켜

이 말세지말에 세계평화를 이루어가는 일에 쓰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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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자
  • 1
  •  주의 은혜의 해
  • 2019-02-22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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