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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의인과 악인

  • 성경말씀 : 시편73:1-28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9-03-24

성경 : 시편73:1-28

제목 : 선인과 악인

 

역대하29:30에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선견자 아삽은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전에서 봉사하는 헤만 여두둔과 함께

세 성가대의 지휘자였습니다.

선견자는 선지자라는 말의 고어로서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의 의미입니다.

아삽은 시편 중에 50편과 73-83편까지 12편을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선견자 아삽이 지은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악인의 모습을 그림처럼 노래하고 있습니다.

4-6절에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11절에 악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며 하나님까지 무시하며 자기 욕심껏 산다 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선인은 14절에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아삽은 하나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어찌 이러하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16절에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삽은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게 하신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19절에 주께서 참으로 악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악인들은 전멸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깨달은 아삽은 25절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시대가 다윗왕 때인데 이 시대에도 이런 악이 보편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곤혹스러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본관은 경북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를 3년 내에 처형하지 못하면 모두가 자살하기로 하였답니다. 그해 10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습니다.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형을 언도받아 19103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사형일이 결정되자 7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중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아들 도마(안중근 의사의 가톨릭 세례명, 1897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교였던 프랑스인 뮈텔은 그를 살인자로 여겨 장례미사 집전을 거부 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지난주 이 사실을 포함 일제강점기 동안 신도들의 삼일운동 비롯 독립운동 참여를 방해한 것과 대동아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 것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올림.

 

편지를 받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에게 수의와 함께 보낸 답신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에 대한 몇몇 평가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을 조사했던 일본 검사)

"혁명가가 되려거든 손문처럼 되고, 대장부가 되려거든 안중근처럼 되라" -중국 속담-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이 아니라, 세계의 안중근이다"

-중국의 석학 '장타이옌'-

사형직전 동생과의 면회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시체는 아직 조국으로 옮기지 말고, 조국이 자유독립을 쟁취하게 되면 그때 조국으로 옮겨서 매장하여 다오

우리는 아직 이 유언을 지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효창공원과 국립묘지가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중근과 그 가족들인데 안중근의 순국이후 안중근 가족의 삶은 참으로 비극적이었습니다.

가족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며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난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안 의사는 부인 김아려 사이에 12(현생, 분도, 준생)을 뒀습니다. 안 의사가 1910326일 순국할 당시 어머니 조마리아와 부인, 세 아이는 러시아 연해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안 의사가 의거 직전 일제 탄압을 우려해 가족들을 러시아로 이주시켰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안 의사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여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황해도 해주 명문가에서 편안하게 살던 이들은 낯선 땅에서 교민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1911년 여름 어느 날 가족이 길림성 목릉현에 살 때 장남 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습니다. '분도가 강변에 나갔다 갑자기 비지땀을 흘리면서 배를 끌어안고 들어오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 김아려가 당황해 "어찌 된 일이냐?'며 물었다. 분도는 '웬 조선사람이 낚시질을 하며 나를 부르기에 가까이 갔더니 과자를 먹자고 했어요. 그 사람도 먹고 나도 먹었는데 이렇게 배가 아파요." 분도는 말을 잇지 못하더니 어쩔 사이 없이 숨지고 말았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낚시꾼은 일본놈들이 파견한 자로 일본놈들은 앞으로의 일을 우려해 안중근의 후손들까지 멸족시킬 야심이었다.'<안중근과 함께 구속된 유동하의 여동생 유동선 진술>

둘째 아들 안준생이 경성(서울)에 온 것은 32세때인 193910월쯤이었습니다. 상해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그는 상해 조선인의 '만선시찰단'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준생은 남산에 이토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현 신라호텔 자리)를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당시 일본광업사장)를 만나 사죄했습니다.

10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가 만나는 장면은 신문마다 대서특필됐습니다.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안준생의 담화도 함께 게재됐습니다. 그후 안준생은 1950년 전쟁의 와중에 귀국했다가 1952년 사망했고 그 부인과 1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들이 살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8세때 아버지를 잃은 장녀 현생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떠돌다, 19605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사망했습니다. 슬하에 두 딸을 뒀고 서울 강북구 삼각산 자락에 묻혔지만 무덤은 쓸쓸하게 방치돼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에 대해 기억도 관심도 배려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중근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의 현재 월 평균 소득은 200만원이 안 되고 학력이 고졸 정도인데 친일파 자손들의 재산과 유학 및 서울 연세 고려대 진학률은 일반인의 몇 배를 넘는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 후손들이 이 땅에 살기를 힘들어하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형편 때문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순사노릇 하던 자들이 독립된 대한민국의 경찰요직에 있고,

독립군을 잡아들이던 만주군의 괴뢰들이 대한민국 군대의 상층부에 있고,

호위호식하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사회 각계각층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백범 김구가 암살되자 그 마수가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칠까하는 두려움으로 자식들의 성까지 바꾸어가며 흩어져 숨죽이고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였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못하게 하고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물질적으로 좀 편리하게 살지는 모르지만 편안하지도 못하고 행복하게 살수는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악인들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래도 근래에 들어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나라 각 방면에서 각성하고 회개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요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도 사랑과 공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당연히 한 개인이 기준이 될 수가 없고 또한 어느 나라나 민족이 척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가름이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사랑을 행치 않는 자, 공의를 행치 않는 자가 악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부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삼일절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 삼일절을 내세워 선진들의 희생을 이용하고자 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평안을 위하여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삼일절을 기념하는 것은 삼일절이 우리나라의 역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리기 위함이며 또다시 삼일절의 상황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결단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원드립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설교자
  • 1
  •  의인과 악인
  • 2019-03-01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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