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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아름답도다

  • 성경말씀 : 로마서10:9-15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7-09-03

성경 : 로마서10:9-15

제목 : 아름답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모스크바 빈민병원의 군의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보다 7년 후에 톨스토이가 태어납니다.

대표작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11872),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791880) 등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보다 29년 먼저 188161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849222일 그의 나이 28세에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페트라세프스키 회원 20명은 반역죄로 팔 개월 동안 군사기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영하 20도의 모진 추위 속에 사형장을 끌려나간 것입니다.

연병장에서는 이미 처형을 위한 말뚝이 스무 개 박혀 있었고 총을 가진 병사들이 일렬횡대로 정렬되어 있었습니다. 처형대 위에 올라간 죄수들이 두 줄로 자리 잡자, 곧 이어 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총을 겨누는 바로 그 때, 급히 소식을 전하는 자가 말을 타고 달려왔고, 집행관이 갑자기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사격 중지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죽음의 낭떠러지에 직면했던 그 순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갈림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사형대신에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소식을 전하는 자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들은 사형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자칭 민중을 사랑한다는 젊은 지성들을 혼내주기 위한 그리고 자신의 자비심을 나타내기 위한 연극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경험에 대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 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 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 데 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작품 백치에 그리고 여러 작품에 내재되어 있고 그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전해진 소식은 조작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서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세상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와 죄로 말미암는 형벌은 죽음과 영벌입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 형벌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못합니다. 죽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영벌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우리의 과거를 보아도 알 수 있고 현재를 보아도 알 수 있고 미래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그 자체적으로 멸망을 향하여 치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섭리를 인간의 논리로 바꿀 수 없습니다.

둘째는 죄인 됨을 인정하지만 그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구원이 길을 찾으려 한다든지 스스로 선을 행하여 죄의 문제를 가름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사함을 받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은총 가운데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감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셨고 죄와 사망의 법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는데 주의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며 입으로 시인하는 일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나 다른 어떤 것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믿는 것 즉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고 그리고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하셨습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주인이냐 종이냐 당연히 부자냐 가난하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죄가 조금 있느냐 많이 있느냐의 구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예수의 이름을 전해주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7:11-13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된다 하였고 특히 부정한 자들이라 하여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 다는 것은 감염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그들을 더 사랑하는 자가 있어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잠언 6:16-19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만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하셨습니다.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에 빨리 달려가는 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 그리되고 있지 못한 것일까요?

첫째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 일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체험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적어서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전파 명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에서 저 뒤에다 놓고 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 모두도 이 시대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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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답도다
  • 2017-09-03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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