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주일오전 1부 예배

 

청함과 택함

  • 성경말씀 : 마태복음22:1-14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16-11-13

성경 : 마태복음22:1-14

제목 : 청함과 택함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2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하였는데

이는 유대적 표현이고 뜻은 천국은 마치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입니다.

 

혼인잔치에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청하였지만 오기를 싫어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읽을 때마다 부딪히는 대목인데 왜 가기를 싫어하였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혹자는 가져 가야할 선물이 부담이 되어서 였을 거라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요즘도 경조사에 축의금이나 조의금이 없으면 가기가 꺼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선지자들의 부름에 이스라엘이 기꺼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로의 부름을 싫어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한 부름도, 예수님을 통한 부름도, 사도 바울을 통한 부름도 그들은 싫어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복음 전도자들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부름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 마귀들은 자신들에게 속한 자들을 결코 쉽게 내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못들은 체 하고,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속이고, 때로는 성을 내고, 때로는 공격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였지만,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습니다.

임금의 혼인잔치에 가는 것보다 자기 밭, 자기 사업이 더 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남의 얘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경험했던 일일 것입니다.

더 악하게 반응하였던 자들 가운데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전도의 측면에서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환대를 받던지 냉대를 받던지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자신에게 자꾸 귀찮게 전도를 하러 오는 분에게 하도 화가 나서 물박아지를 끼언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끈질긴 예수귀신이 떨어졌겠지 했는데, 그때부터 스멀스멀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어떻게 정리가 안 되더랍니다. 본인이 물박아지를 예수쟁이에게 끼언졌는데 되려 자신이 복음의 박아지를 뒤집어쓰게 되어서 교회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도하다 모욕당하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비유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악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래서 악인도 악한 날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하신 탄식이 있으셨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8)”

하신 당부가 있으셨지만 결국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하여 완전히 진멸당하고 불탄 일이 있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기계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함께 역사하십니다.

임금은 이제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였습니다. 종들이 세 번째 순종하여 갔습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야산에 버려진 우편물 뭉치들을 보여준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우편배달부가 전달하기가 귀찮아서 주로 광고성 우편물들을 버린 것들이었습니다. 태우거나 묻지도 않고 그냥 던져버린 것인데 누군가의 발견과 신고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교회나 보면 전도행사 하고 나면 전도선물들이 집안에 꽤나 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받은 말씀, 우리들이 받은 전도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었습니다. 종들은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였습니다.

 

11-14절은 이야기에 급박한 반전이 있습니다. 예복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나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살벌합니다.

설명이 많이 필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그들은 길거리에서 초청을 받고 바로 잔치자리로 왔기 때문에 따로 예복을 준비할 수도 집에 가서 입고 올 수도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의 혼인잔치에는 예복이 준비 되어 있어 그것을 입고 들어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입었는데 그 한 사람만 입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에 들어오기는 왔지만 끝내 세상에서 입었던 자신의 옷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자기 의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계시적 사건으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옷을 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보면 알곡과 가라지입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며 그 내용이 참으로 엄중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당연히 예정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히 믿음입니다.

청함을 받지 못한 이가 한 사람도 없도록 적어도 나의 삶에 영역에서는 없도록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택함을 받은 자임을 믿고 택함을 받은 자답게 그렇게 권세 있게 이 세상에 주눅 들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설교자
  • 1
  •  청함과 택함
  • 2016-11-18
  • 방영철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