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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성경말씀 : 누가복음7:11-17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11-01

2020111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7:11-17

제목 :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19481019일 여순사건때 안재선 청년이 손양원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25) 동신(19)을 일단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처형하였습니다.

안재선이 체포되고 처형될 상황이 되자 손목사님은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를 양아들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이었고 반대가 있었는데 손목사님은 내가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까지 희생하며 5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지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는 다면 이 말씀은 지키고 저 말씀은 지키지 않는 일이 되니 그럴 수 없다 하셨다고 합니다.

1950913일 손양원목사님은 48세에 북한군에 의해 총살당하였습니다.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안재선은 맏상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손목사님의 9가지 감사 기도입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목사님은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보입니다.

 

202010월 이동원 목사님이 먼저 별세한 아들을 보내며 적은 감사의 글을 인터넷상에서 보았습니다.

 

1.아들이 그 지독한 암의 통증에서 해방되어 감사합니다.

2.영광의 나라 천국에 입성하여 감사합니다.

3.그동안 유머가 많았던 아들을 인해 누린 기쁨을 인해 감사합니다.

4.단 한 번도 불평 없이 자랑만 하던 아내와 애교덩어리 손자를 남겨주어 감사합니다.

5.어려서 게임을 좋아하더니 게임변호사가 된 것 감사합니다.

6.아들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늘 아버지의 고통을 알게 하심 감사합니다.

7.아들의 암투병을 통해 수많은 암환자의 고통과 연대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8.또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수많은 부모들의 고통과 연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9.아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수많은 중보 기도자들과 한 지체가 되어 감사합니다

10.아들이 간 천국을 더 가까이 소망하게 되어 감사 감사합니다.

 

칼 바르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독일의 신학자로 그의 나이 45세인 1941625, 스위스 부벤도르프에서 자신의 셋째 아들 로베르트 마티아스 바르트의 장례식 예배를 집전하며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나흘 전 622일은 2차대전 발발일에 마티아스는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 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본문은 고린도전서 13:12였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 속에서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으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현재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그분과 함께 지금그때가 교차하는 접경지역에 서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경계선에 서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 접경은 빛이 어둠 위를 비추는 곳, 죽음의 목전에서도 생명으로 인해 기뻐날 뛸 수 있는 곳, 죄인이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곳, 포로로 잡혀있지만 자유로운 곳, 길이 보이지 않는데도 오히려 소망을 품게 되는 곳, 의심 중에도 확신을 얻게 되는 곳, 비통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곳, 바로 그런 곳입니다.

마티아스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바로 이 접경지역 외의 다른 어느 장소에도 우리 자신을 두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이 경계선을 넘어갔지만 우리는 아직 이쪽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접경지역에 서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티아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그 거리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그때”, 이 둘 사이에는 조금의 거리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마티아스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그 아이의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변함이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죽음, 죽음과 생명 양쪽 모두에 대해 가르쳐 주셨으므로 우리는 마티아스를 기억하며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구약성경 사무엘하 1223절에 나오는 다윗이 그의 죽은 아들을 향해 한 말을 거듭해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저는 왜 자신이 더 이상 금식하지 않고 울지 않아야 하는지를 정당화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에 그 어느 때보다 놀라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지”(고전15:20) 않았더라면 다윗은 정신 나간 냉혹한 아버지로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이 어두컴컴한 지금이 그 찬란한 그때와 이렇게 가깝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어떻게 그 끔찍한 고통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설교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당장 기뻐할 수는 없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환희로 가득 찬 음성을 이 모든 일이 일어났던 악한 장소 프뤼덴호른이나 우리가 방금 전에 보고 온 무덤에서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이 환희로 가득찬 음성은 이 불완전한 자들마저 완성될 것에 대해, 또 마티아스가 어떻게 죽음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완성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은 평화와 기쁨과 더 풍성히 얻게 되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10:10) 이런 음성을 듣게 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 마티아스의 삶과 죽음의 목적을 이루신 그분께 감사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목적도 동일하게 이루시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관계의 두 사람의 끈이 끊어진 것이고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다시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비통함을 무엇에 비하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주신 일이었습니다.

지금그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 보이시는 계시적 사건이었습니다.

 

바르트의 글에는 지금과 그때의 완성으로 인해 이루어질 일들에 확신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지만 인간적인 바램과 아쉬움을 남긴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다시 함께 지금이 주어진다면 하고 싶은 일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인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에 남게 된 우리는 그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하며 여러 날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습니다. 그 아이가 생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 왜 좀 더 잘 해주지 않았을까, 왜 한 번만 더 아이의 손을 잡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열망에 사무쳐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심을 이루는 말입니다.

 

20세기에 하나님과 인간을 가장 잘 알고 믿었던 분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어라 하실까 관심이 많았는데 우리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아주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손양원목사님도 이동원목사님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 모든 이들에게 가장 절실히 다가오는 바램일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그때가 연결되었으니 그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이들에게 좀 더 잘 해주고 한 번 더 손을 잡고 따듯한 대화를 나누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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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2020-11-06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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