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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물 위를 걷는 믿음

  • 성경말씀 : 마태복음14:22-33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11-08

2020118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마태복음14:22-33

제목 : 물위를 걷는 믿음

2011626일 영국의 28살 스티브 프레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위를 걸어서 테임즈 강을 건넜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처럼 보였지만 실상 물위를 걷는 마술은 미리 투명 아크릴로 물속에 다리를 만들어 놓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주변에 보조 연출자들을 여럿 세워 놓기도 합니다.

마술사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어떤 뜻으로 하신 일이 신지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건을 기록한 본문은 갈릴리 벳세다에서 있었던 오병이어 이적 직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오병이어 이적으로 인하여 무리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는 소동이 일어나자 예수님은 그 흐름에 제자들이 영향 받지 않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셨건만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십자가를 향해서 가던 그 길에서 제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그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될 것인가를 가지고 마음속에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원죄에 교만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는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그리하는데 정신이 들어 살펴보면 대부분 그 중심에 뿌리에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 일이 제자로 부름을 받은 초기에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자로서의 훈련을 마칠 때인데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가지 면에서는 억지로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3년이나 훈련을 받아도 이 모양이니 우리들이 3040년 믿음 생활 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 쓰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한심할 때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다 하는 생각은 듭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을 보내신 후에 예수님도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 산은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큰 언덕이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이 있으셨던 그 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늘 기도가 있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는 밤새도록 산기도를 하시고 12명을 세우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셨을까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들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셨는데 오늘 오병이어에 대하여 저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는 근심도 있으셨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기도가 필요하셨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위한 기도도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의 외침이 남긴 울림을 몰아내시기 위한 기도가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애타게 찾는 저들의 간절함을 이렇게 외면해야만 하는 것인지, 나에게 한 번만 절하면 온 세상의 권세를 주겠다고 하며 그 권세로 세상을 구원하라는 마귀가 광야에서 한 그 소리가 무리들의 외침 속에서 들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야하는 이 길이 십자가의 길 말고 왕의 길을 통해서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유혹을 떨쳐 내시기 위한 기도로 여겨집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말들 가운데 합당치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소리는 사라진지 오랜데 말은 남아 괴로움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배는 육지에서 수 리나 멀어졌는데 더 이상 전진하지는 못하고 제자들은 바람과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 즉 게네사렛으로 가라 하셨을 때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안 계셔도

적어도 이 일만은 저희들이 주님이 계신 것 보다 훨씬 잘할 수 있습니다고 자만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중 상당수는 어부들이었고 갈릴리 호수는 그들의 놀이터였고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고기 잡는 것도 아니고 단지 건너기만 하는 일인데도 그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의 실패는 어려운 일에 있지 않고 아주 쉬운 일에서 생겨납니다. 아주 쉬운 일 그래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일에서 큰 실패가 일어납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가 저물 때 였는데 그 시간을 오후 6시로 본다면 적어도 9시간은 지난 때입니다. 아홉 시간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가 주무시지 않았을까요? 너무 피곤하셔서 그리 되셨을 수도 없지 않습니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셔서 시간이 그리 지났는지도 모르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빛(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음을 이미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의 흐름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최선을 다해보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 이었겠다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들이 당혹스럽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어떡하던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너무 무겁고 잔인한 말이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안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제자들이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기도는 필요한 일이요 은혜이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삶의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낭비 같아 보이는 시간도 주님 안에서는 다 이유가 있는 시간들입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불고 있는 이 바람은 자연적인 바람과 함께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음으로 인한 제자들의 심령 속에서 부는 바람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왜 우리만 보내셨을까? 그곳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그들과 예수님은 왕이 되시고 있는 것일까? 우리 없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바람이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 위에 오르자 그쳤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서도 요상한 바람들이 수시로 붑니다. 주님이 오셔야 그 바람이 그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유령이라 여겼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올 수 있는 이는 유령 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출애굽 사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요약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였습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요?

물 위를 걷고 있는 이가 주님이신지 아닌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만일 주님이시거든 이라 하였을 것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면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겠다는 뜻이 아닐까요?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면 믿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언덕에서 제자들이 있는 자리까지 날라 오시면 안 되었을까요?

아니면 순간이동을 하시던지, 왜 굳이 물 위를 걸어서 오셨을까요?

그것은 적어도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에게 있어 절대로 불가능한 일에 해당하는 것이 물 위를 걷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쌓여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물 위로 걸어오심을 통하여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 위로 걸어 오라 하심을 통하여 그들의 불가능 그들의 한계를 넘어 서게 하시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을 통하여 만들어 집니다.

내가 나를 안다고 하는 것으로 나의 한계를 만들고 내가 남에 대해서 아는 겨우 몇 가지로 사실들로 그의 한계를 규정하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모르고 살 수 없고 알고 살아야 하는데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선악과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주님께로 물 위를 걸어서 가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는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 주변에 이는 물결을 보는 순간 무서움이 생겨 그리되었다 하였습니다. 사단 마귀는 할 수 만 있으면 우리의 시선을 주님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기게 만들고자 합니다. 때로는 거짓으로 때로는 이간질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그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2:2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하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세상이 온통 요동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던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소리를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 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에게 물에 빠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도 가까이 있었고 헤엄처서 가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면 이전에 능히 할 수 있던 일들도 온통 두렵게 되고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이러한 상황이라고 여겨지시거든 베드로와 똑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체면 차릴 것도 없고 다른 구원이 없나 살필 것도 없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습니다. 믿음도 있고 없고의 차원이 있고 크고 작고의 상황이 있습니다.

히브리서11:38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셨는데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억과 지식과 경험과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가 가는 이 길은 대부분 배를 타고 갑니다. 경험과 상식과 관례와 이성과 전통 등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길은 배를 타고 갈 수 없고 물위를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이 잠깐 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바울도 물 위를 걸어 간적은 없습니다.

그 길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생겨납니다.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믿은 베드로가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생겨난 길입니다!

그 길을 가고 나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복음이며 이 복음은 누군가의 삶에 의해 전파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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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 위를 걷는 믿음
  • 2020-11-13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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