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주일오전 1부 예배

 

결 핍

  • 성경말씀 : 욥기2:1-13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08-30

2020830일 주일낮 예배

성경 : 욥기2:1-13

제목 : 결핍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읽고 위로를 받는 성경이 욥기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그의 회복에서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욥이라는 이름자체도 고난 받는 자라는 뜻이며,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를 증거하는 성경 말씀이 두 곳에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에스겔14:20에 하나님께서 직접 에스겔에게 이르시는 말씀 중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욥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약5:11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함으로서 야고서의 저자인 야고보가 욥의 존재를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욥기 자체내에서 보면 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이 족장시대의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출애굽 이전의 인물입니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쯤의 인물입니다.

 

그는 동방의 우스 땅에 거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는 한 명의 부인과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고 많은 소유물을 거느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계속해서 닺쳐 왔습니다.

 

첫째는 그의 많던 재산들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것은 자연 재해로 그리되었습니다.

둘째는 그의 자녀들이 일순간에 모두 죽었습니다.

셋째는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넷째는 그의 부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모든 것이 회복되는데 이 부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섯째는 욥은 이 이유들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욥기 3-31장에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 이어집니다.

2: 11-13에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이 삶이 훌륭하였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이기도 한데 욥의 고난 소식을 듣고 세 친구들이 각지에서 달려왔으며 와서는 그 참혹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밤낮 칠 일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친구들이 계속해서 아무 말도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기는 한데,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럴 때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사랑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세 친구들의 말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습니다. 인과응보론을 말하면서 네가 죄가 있으니까 이와같은 벌을 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욥의 답변은 내가 아무 죄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같은 벌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으며 그러하니 하나님께 이 문제에 대하여 설명을 들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답답한 논쟁이 되풀이 되고 있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긴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대화가 있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는 주장만 있지 대화가 없습니다. 욥기를 통한 권면 중에는 대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나중에 왔고 나이도 많이 적은 엘리후가 32-36장에 등장합니다.

그의 말은 우선은 마치 욥의 말이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 여기는 것 같다 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세 친구들에 대해서는 합당하지 않은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이 고난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37장부터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하나님께서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다 듣고 계셨다는 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지 그들의 말을 아니 듣고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대화에도 그리하신 줄 믿습니다.

 

욥은 자기의 고난의 이유를 두고 하나님과 쟁론하기를 바랬고 이길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욥이 질문하고 있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그가 창조하신 자연 질서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증명해주시며, 욥의 무지를 이에 대비시켜 주셨습니다. 네가 아느냐, 아느냐, 아느냐 하신 그 물으심 들입니다.

모든 것을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여겼던 욥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들 뒤에 함축된 의미는 도덕적인 질서도 삶의 실존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욥도 친구들도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2:2-6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사실 우리의 많은 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인내의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욥은 세 친구에게 자신을 변호한 것이 얼마나 옳은가에 상관없이 자신이 자신의 무지와 함께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인내심이 없었다는 점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모든 인생이 고난의 문제를 떠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고난이 단순한 인과응보의 논리로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역시 인과응보의 신학을 거부하셨습니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지혜자이십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면은 욥이 하나님과 화해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리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욥기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고난 중에 있는 이 시대에 욥기의 말씀을 다시 나누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때에 욥기를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떠오른 단어가 오늘 설교의 제목인 결핍이었습니다.

결핍이란 말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란 상태를 말합니다.

결핍은 외부적이며 강제적 결과입니다. 반면에 자기비움은 내부적이며 자발적 결과입니다.

욥에게 임한 결핍은 재물이었고 건강이었으며 부인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에게서 결핍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핍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현상적으로는 빈자리가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핍으로 인한 빈자리가 생겨야 새로운 것이 채워질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읽고 있는 당신은 뇌를 고칠 수 있다 라는 톰 오브라이언 박사의 책은 자가면역 질환을 다루고 있는데 인간의 자가면역 체계가 정상 작동하여 상처나 문제가 있는 세포를 공격하여 그 자리를 비게 만듦으로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한 동안 한국교회는 아니 우리 믿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결핍이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죽음도 멀리 있었습니다.

제가 최근에 아프카니스탄 카불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두 편 보았는데 그곳은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200, 400, 300이 우리에게는 코로나 확진자의 숫자인데 그들에게는 하루에 자살폭탄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살아있는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많이 웃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있으니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알지 못하니 삶을 알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실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아주 많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래서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며 살고 있습니다.

 

매일 주기도를 드리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지만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가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음식의 결핍이 없는 시대에 냉장고만 열면 미처 먹지 못한 음식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일용한 양식을 주셨음에 대한 감사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나를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소서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기도 하며, 도적질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기도 합니다.

 

큰 병이 걸려도 병원가서 약 먹든지 수술하든지 하면 낫게 되니까 큰 병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배와 말씀도 넘쳐 났기에 소중함도 간절함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는 여러 가지 결핍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건강적으로도 사회적 관계적으로도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심각한 결핍의 요인이 되고 있고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결핍들을 통하여 귀로만 들었던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욥과 같은 정도의 신앙의 삶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도 이제까지 원하던 원치 않았든 간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로 채워져 있어 정작 주님은 계실 곳이 없는 심령이었지 않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심령이 주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주님은 무한하시니 그 안에 아주 많은 것을 담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도 하나님의 나라도 작은 자도 큰 자도 그 무엇도 담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때가 어서 속히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래도 코로나 때가 좋았다라고 말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 세상은 주님의 날을 향해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오늘 하루하루를 더욱 귀히 여기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현재의 결핍을 자기비움을 통하여 오히려 주님으로 채울 기회로 알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기원 드립니다!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설교자
  • 1
  •  결 핍
  • 2020-09-04
  • 방영철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