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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어린 아이와 같이

  • 성경말씀 : 누가복음18:15-17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05-03

202053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 18:15-17

제목 : 어린 아이와 같이

 

오늘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어린이 주일이라 하며 말씀도 듣고 행사도 하여 왔는데 정작 어린이 들은 아직 교회에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학교가 현장 개학을 하는 시점에서 교회학교도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여러 소리들 중에 아이들 소리가 참 좋은데 특히 우리 교회는 아이들 소리가 크게 들렸던 교회인데 한 동안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아 서운하고 안타깝습니다.

자연환경적으로도 아이들까지 다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가습기 독성 물질로 폐가 손상된 아이가 인공호흡기를 쓰고 산소병을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너무도 가슴이 아팠는데 이제는 모든 아이들이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하여 그러하고 이제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리 되어서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세상에 대한 염려와 미안함이 있습니다.

누구의 탓이라가기 보다는 아무튼 어른들의 탓입니다.

 

누가복음 18장 시작에서 본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어른들이 나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들입니다.

18장에 나오는 순서대로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2절에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입니다.

재판장은 하나님 다음의 권세를 가진 직분입니다. 신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역할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맡은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라고 하면 통제나 예방할 수 없는 큰 해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린 아들들 가운데 누군가는 재판장이 될 터인데 그 아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재판장이 되도록 우리 어른들이 잘 키워야 할 것입니다.

9절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종교적 권세가들은 아니었습니다. 권세가는 헤롯당이나 사두개파였고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아니하고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잘하는 일이나 당연한 일이고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하고 감사해야 할 일은 자기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4: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아이들 가운데도 그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는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려 오는 부모들을 꾸짖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일 가까운 제자들이었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았을까요?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이 어린 아이들은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피곤케 하거나 짐이 된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늘 문제가 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교회의 문턱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주후 62년 경 주님 부활 승천하시고 겨우 30년 되었을 때에 주의 형제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서 2:1-4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하심은 없었던 일을 미리 걱정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권고의 말씀으로 보이는데 같은 일들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종의 문턱, 남녀의 문턱, 빈부의 문턱, 지역의 문턱, 이념의 문턱이 있고 어떤 상황이 되면 항체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차별되는 문턱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이 되었을 때 그들의 생각과 판단대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살펴서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부분이 보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어른들이 바른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첫째는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을 숫자에 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셨고 부르셨습니다. 아이들의 가치를 아셨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아이들을 부르신 것 같이 아이들을 주님께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누구도 어린 아이인적이 없는 사람은 없고 어린 아이 때의 영향이 그의 일생에 지대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 세계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자라나서 저 역할들을 할 터인데 어린 사무엘처럼 일찍부터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자라 좋은 지도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올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국교회가 나이순으로 보아 피라미드 구조였을 때가 그리 오래전은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기 전에 주일학교 초등부 그러니까 3-4학년 부장집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초등부만 200명이 넘었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역 피라미드 형태가 되었습니다.

인구분포, 사회적 현상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고 그에 대한 대안들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오늘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올 수 있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무겁게 다시 새겨야 하겠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바쁜 삶을 강요당하고 있어 주님께로 올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어머니 품에 얼마 있지도 못하고 시설로 아침 일찍부터 가야합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되는 경쟁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고 나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여기 저기 다녀야 하는 곳이 아주 많습니다.

교회에 다니다 안 다니는 아이에게 너 왜 교회 안 오니? 묻자 교회 끊었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회도 하나의 학원처럼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주일학교를 빼 먹는 것도 문제지만 주일학교만 다니는 것도 문제입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남짓한 시간으로 한 아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보면 아주 어려운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주일학교가 아니라 주중을 포함한 교회학교 개념을 생각합니다.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근본적으로는 아이가 자라는 곳은 가정인데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신앙교육을 생각합니다. 교회학교와 가정이 합력하여 한 어린 아이를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 아이가 갖고 있는 미숙함입니다. 인내력이 부족하든지 이해력이 부족하든지 지식이 부족하든지 경험이 부족하든지 등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들의 순전함입니다. 정결하고 착하고 순진하고 잘 믿고 잘 받아들이고 긍정적이고 잘 잊고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있고 자주 웃고 많은 말을 하고 자주 행복해 하는 모습들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한계점은 극복하고 장점은 잃지 않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아이들이 갖고 있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장점과 같은 심령을 가리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하였는데 어른이 어린 아이와 같아지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은 말씀이 그 심령에 심겨진 사람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겠지만 늘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하고 우리들도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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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아이와 같이
  • 2020-05-08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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