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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교회같은 가정 가정같은 교회

  • 성경말씀 : 룻기1:15-18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05-24

2020524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룻기1:15-18

제목 : 교회같은 가정 가정같은 교회

 

사사 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 엘리멜렉과 그의 부인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 이었습니다.

그 지방에 흉년이 들자 그들이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인류역사의 큰 진전이지만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믿음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모압은 요단강 동편 땅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지경 밖이었습니다.

나무의 미덕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그 존재 자체로 많은 타자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온갖 생명체들이 깃들어 살게도 하며,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를 자신이 먹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한 번 그 자리에 심겨지면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 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썩어 다음 나무의 거름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을 흉년으로 인해 떠났다가 큰 어려움을 겪고 다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사명의 자리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가정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모압에서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죽었고,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저들의 죽음에 특별한 이유를 부여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추론은 가능합니다. 믿음과 관련 없이 단지 흉년을 피하여 사명의 자리를 떠난 그 가정이 이방인의 땅에서의 십 년 이란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해체된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남았습니다.

그 때에 유대에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모압에서 계속 살지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나오미의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두 며느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앞으로 계속 한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가? 살 수 있을까? 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기룐의 부인이었던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며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고향땅 자신의 이전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말론의 부인이었던 첫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그는 이르기를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시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룻의 말이 감동적이기는 한데 썩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왜 그는 오르바와 같이 고향에 남아 그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일까요? 나오미와 함께 가는 것이 무슨 바램과 의미가 될까요? 나오미와 연결된 끈이었던 남편 말론이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그 관계가 지속되기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룻의 말속에 들어있는 뜻들을 살펴보면 룻이 계속 가고자하는 것은 인간 나오미가 아니라 나오미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무관하거나 의미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존재와 내면이 통전적이지 어느 부분이 분리되어 존재하거나 기능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룻이 한 말은 육신적 가정에서 믿음의 가정으로의 출발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육신적 가정은 인간적 언약과 혈연에 의해서 이루어 졌지만 믿음의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믿음의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나오미가 그들과 함께 산 세월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라는 뜻은 희락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다시 룻과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 달라 하였습니다. 마라의 뜻은 괴로움입니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가 그리 말할 만도 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가 흉년을 피하여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겨우 며느리 하나와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를 보고도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무엇보다 귀히 여긴다 함이니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특별하게 증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머니를 그와 같이 살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계신다 하여도 나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 않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두 며느리가 같이 들었을 터인데 그 중에 하나는 다른 길을 갔다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의 가정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인물이었던 보아스는 엘리멜렉 가족의 기업 무를 자였고 그리하여 룻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였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 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였고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앉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습니다.

믿음의 가정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가 된 것입니다.

 

가족은 천부적 속성이 있습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인위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입니다.

그러하니 무엇보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사회를 해체하며 거리 두기를 권면하는 가운데도 가족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땅에서 가족은 하나님 나라의 최소단위입니다. 더 이상 붕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즈음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있는데 가족에게 부여하신 천부적 속성을 지키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족은 천부적 속성 외에 믿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개인 이기주의 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가족이기주의입니다. 내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는 남의 자식이 해를 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까지 여기는 것은 가족이 혈연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0:36-37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원수가 가지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하셨고, 마태복음12:50에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하니 가족 안에 믿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19로 인하여 온 가족이 영상예배를 드리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이 일들을 계기로 가정예배가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영적인 대화가 있기를 그런 노력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족은 그리스도의 윤리를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6:1-4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셨습니다.

에베소서5:24-25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 할지니라 하셨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실천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훈련의 장이 되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계기가 됩니다.

저는 이러한 일이 교회같은 가정 가정같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2:15의 말씀처럼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가정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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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같은 가정 가정같은 교회
  • 2020-05-29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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