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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 1부 예배

 

강도 만난자의 이웃

  • 성경말씀 : 누가복음10:25-37
  • 설교자 : 방영철
  • 설교일 : 2020-06-07

202067일 주일낮 예배

성경 : 누가복음 10:25-37

제목 :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2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구내에 진입한 전동차 안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사망자 192, 부상자 148명 등 3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입니다. 범인 김대한은 당시 56세로 화물차 운전과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뇌졸중으로 우편 상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우울증까지 겹쳐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플라스틱 용기에 휘발유를 사서 지하철 전동차에 방화를 한 것입니다.

불이 나자 기관사는 정신없이 차문을 잠겨 놓은 채로 혼자 피신을 하였고 남아 있던 승객들도 당황하여 비상으로 문을 여는 자가 없어 화염과 연기에 해를 당한 것입니다.

한낮에 지하철에서 그러했으니 수 많은 전화와 문자 사연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불이 타들어 오는데 너무 뜨겁다 못 나갈 것 같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장난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김대한은 병원에서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정도 수감되었다가 지병으로 옥사하였습니다. 그는 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쳤지만 그 자신의 인생도 강도 만난 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 중에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아서가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청소를 다니던 부인, 직장에 다니던 아들, 학원 강사였던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보건데 경제적으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이제까지 가족의 책임자로 가족의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몸이 그리 되자 소외되고 존재감이 사라진 듯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 그를 그토록 왜곡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들어주는 자가 있었더라면 한 사람이라도 그리했더라면 그가 그러한 극단적인,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그의 후회와 원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회심 후 예루살렘에 왔었을 때 그곳의 그리스도인 다름 아닌 초대교회의 그 은혜의 사람들 중에도 사울을 받아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사울을 의심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아무도 중보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사울에게 더 이상의 길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바나바가 자신의 삶을 담보로 사울을 소개함으로서 그가 예루살렘에서도 교제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 훗날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실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평범했던 남자였던 아이히만이 왜 유죄일 수밖에 없는지를 악의 평범성으로 역설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강도 당한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이였습니다. 그가 여리고 사람인지 예루살렘 사람인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강도들이 그의 옷까지 벗겼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이 사건에서 강도당한 자가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또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었고 누구나가 가야했고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굳이 문제라고 해야 한다면 그 길을 혼자 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은 강도와 험한 지형의 위험 등이 있어 혼자 가지 아니하고 무리를 지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강도들이 저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한 것은 그에게서 약탈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화풀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강도당한 자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제 기준으로 코로나19 확진자는 11,719명이며 격리해제가 10,531명이고 사망자는 273명입니다.

이분들이 코로나19의 확진자가 된 것이 이 분들의 잘못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잘못을 찾으려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여행을 갔느냐/ 왜 좁은 공간에 모였느냐/ 왜 이런 시국에 그런 모임을 하였느냐 등등인데 피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피하려고 노력은 하되 결과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 상황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에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약 90%가 치료를 받고 음성판정을 받아 격리해제가 되었지만 그 후 일상의 삶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따라 다니는 비난의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자신이 다녔던 회사가 큰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 무게감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한 이들도 있었고, 회사에 다시 들어가도 동료들이 기피하고 거리를 두고 심지어는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공항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강도당한 자 옆을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혹시 강도들이 다시 나타날까봐, 강도당한 자가 도와 달라는 소리라도 할까봐 아니면 손을 뻗어 발목이라도 잡을까봐 피하여 지나간 것입니다.

강도당한 자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고, 얼마나 아프냐고 묻지 않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다가가지도 않았고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속히 그 자리를 피하고자할 뿐이었습니다.

허탕을 친 강도들이 그들의 길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들이 무사히 그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그 길을 여행하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우선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자기 짐승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정입니다만, 그도 그 날 여리고로 계속 갔더라면 강도를 만났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코로나19를 비롯하여 이 시대에도 수 많은 강도 만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대하여 우리들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 하며 그냥 피하여 지나가려고 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합당치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대하여 그래도 무언가 잘못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하며 그 고통에 비난까지 더한다면 참으로 주님과 멀리 있는 자일 것입니다.

어떤 의미든 생각이든 마음 씀이든 행동이든 그래도 저 선한 사마리아인에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실 뿐더러 우리가 강도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 누군가가 돕는 자로 우리에게 오게 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니묄러는(1892-1984) 루터교 목사였는데 히틀러의 나찌제국이 들어서자 그에 반대하여 독일 고백교회 운동을 한 분입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도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로마서11:33-36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셨습니다.

 

코로나19를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누가 알겠으며, 더군다나 누가 감히 모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강도당한 자를 피하지 않고 다가가 비난이나 정죄하지 아니하며 그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하며 도와주고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사건의 의미를 그리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분임을 믿을뿐더러 그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또한 믿습니다.

 

이 길 끝에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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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도 만난자의 이웃
  • 2020-06-12
  • 방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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